14일 오후 9시55분에 방영된 SBS 창사 특집극 '그대는 이 세상'(극본 이금림, 연출 이종한)은 여러 모로 보기 드문 드라마였다."한 일이 뭐 있어? 평생 밥이나 축 냈지." 이건 40년 동안 자신을 떠받든 아내에게 던지는 말이다. "그 쪽 같은 딸 둔 기억 없소이다." 이 말은 고등학교 때 아이 딸린 선생님과 결혼해 속을 썩인 딸 영숙(윤유선)에게 던지는 말이다. 가족들에게 아무렇게나 심한 말을 던지는 모진 아버지 박종만(신구). 그러나 이렇게 당당하고 뻣뻣하던 종만은 아내 오점순(나문희)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고꾸라진다. 병원 의자에 앉아 오줌을 지리며 멍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꽤나 쓸쓸하게 시청자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홀로 된 아버지를 누가 모실 것인가 하는 문제로 형제들끼리 옥신각신하는 모습도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미국으로 가겠다는 맏며느리(양미경)와 이를 고까워하는 둘째 며느리(신윤정) 사이의 다툼, 맏이(이효정)와 둘째 아들(권해효) 사이의 실랑이 속에 신구는 아내의 영정을 껴안고 식음을 전폐한다. 이때 마음을 열고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자식이 딸 영숙이다. 신구는 영숙에게 밥 짓는 방법부터 새로 배우며 아내와 딸에게 함부로 했던 과거를 뉘우친다. "이렇게 화해시키려고 엄마가 죽었나봐"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딸의 한 마디는 드라마의 감동을 응축한 대사가 된다.
평생 폭군 같은 남편 옆에서 숨죽이며 사는 아내 역의 나문희, 아내를 잃고 정처 없어 하는 신구의 연기가 시종 드라마를 힘있게 끌고 갔다. 조역들의 연기도 나무랄 데 없다.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둘러싼 갈등과 화해를 정밀하게 엮어낸 연출 솜씨와 군더더기 없는 대사는 수준급이었다. 이종한 PD는 "배우자를 잃은 노인의 홀로서기를 통해 가족애를 되짚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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