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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일대기/ 하늘·바다·땅길 연 輸送史의 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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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일대기/ 하늘·바다·땅길 연 輸送史의 거목

입력
2002.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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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타계한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은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 수송산업사의 산증인이자 수송업계 거목이었다. 그는 해방직후 트럭 한대로 한진상사를 창업한 이후 수송·물류의 외길을 걸으면서 한진그룹을 육·해·공을 모두 포괄하는 수송왕국으로 키웠다.트럭 한대로 시작한 수송왕국 1920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난 조 회장은 15세때 부친의 사업실패로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진해 선원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소 직공생활을 했다. 해방이 되자 그는 귀국해 트럭 한대로 인천 해안동에서 수송업체인 한진상사를 차렸다. 그 때 나이 25살.

막 커나가던 한진상사는 한국전쟁 발발로 24대까지 늘어난 트럭을 모두 징발당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지만 전쟁으로 수요가 늘어난 미8군 군수물자 수송사업을 맡으면서 사세를 회복하게 된다. 위기를 활용해 오히려 성공의 기회를 잡는 사업수완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당시에 대한 조 회장은 96년 쓴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서 '배짱과 허세로 사업을 키웠다'고회상하기도 했다. 미군정 물품운송 계약을 따내기 위해 벤츠를 타고 상담을 벌이고 미군 장교들에게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미군들은 아무리 어려운 여건에서도 일을 밀어붙이고, 계약을 성사시키는 조 회장의 두둑한 배짱에 감탄하곤 했다고 한다.

베트남 특수로 고도성장 이렇게 맺어진 미군과의 인연은 한진이 60년대 베트남전 특수로 고속성장의 기틀을 잡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한진은 65년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자 66년 재빠르게 베트남 군수품 수송사업에 뛰어들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독점적 운송계약에 힘입어 71년 전쟁 종료시까지 5년간 한진이 획득한 외화는 1억2,000만달러나 됐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림과 전쟁은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 한다'는 영국속담이 있다. 그러나 사업을 하노라면 직접 참가하여 전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전쟁터라고 해도 뛰어들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내게 있어서 월남전이 그러했다. 수송사업의 책무였기 때문이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한진이 재벌급 기업 반열에 들어서는 결정적 계기는 69년 적자투성이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 대한항공이라는 세계적 항공사로 키우면서부터. 조 회장은 "회사 임원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권을 물리칠 수 없었다"고 인수경위를 밝혔다.

남다른 경영론 그는 특히 문어발식 사업확장보다는 수송 외길을 강조해 왔다. 그는 모르는 길은 절대 가지 않는 기업인으로 불린다. 그래서 운수물류 주력 3사와 관련이 아주 없는 계열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치밀함이 요구되고 운수물류 경영의 복잡함을 두루 갖춘 대한항공에서 실무경력을 쌓은 인재들이 주요 계열사의 최고경영자(CEO)로 포진한데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자서전에서 "낚싯대를 열개, 스무개 걸쳐 놓는다고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기업가는 국익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에서 회사 이름도 '한민족의 전진'을 뜻하는 '한진'으로정했다고 한다.

그는 집념과 자존심이 남달랐다. 1990년 숙원사업으로 추진하던 구소련 영공통과 합의를 눈앞에 두고 KAL기 격추에 대한 사과를 받기 전에는 서명할 수 없다며 버틴 끝에 구소련의 사과를 받아낸 후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몸에 밴 근검절약 정신으로도 유명하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조 회장의 자택에는 겨울에도 난방을 제대로 하지 않아 자녀들이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불을 때라고 권유할 정도였다. 조 회장이 3남인 조수호 한진해운 부회장의 미국 유학 시절 승용차를 사지 못하게 한 일은 아직까지 재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육영사업에도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68년 인하학원을 인수했고 79년 한국한공대학교와 정석항공공업고등학교를 산하에 둔 정석학원을 설립, 인재양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또 '평생교육, 평생직장' 분위기 조성을 위해 88년부터 가정 형편상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국내 최초의 사내 산업대학인 한진산업대학을 개설하기도 했다.

말년의 시련 조 회장은 그러나 말년에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007기 격추사건을 계기로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동생인 중건(70)씨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특히 1999년 중국 상하이에서 발생한 대한항공기 화물기 사고를 계기로 정부의 압력을 받아 대한항공 회장직을 내놓았고, 그해 말에는 국세청의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때부터 조 회장의 건강도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주변의 말이다. 그러나 와병중에도 그는 그룹의 자구 노력을 막후에서 지휘, 신인도를 회복시켰고 수익성 위주의 내실경영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창업자에게 은퇴는 없다'는 그의 경영자론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김혁기자 hyuk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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