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 국적을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기쁘다."1992년 8월9일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黃永祚·32·국민체육진흥공단감독)가 골인지점을 첫 번째로 통과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자 스탠드에서 관전하던 손기정(孫基禎) 옹은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월계관을 쓴 이후 정확히 56년 만에 손자뻘인 황영조가 따낸 금메달은 평생의 업으로 42.195㎞으로 달려온 그의 길고 긴 싸움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손기정은 1912년 평북 신의주에서 잡화점을 하던 아버지 손인석, 어머니 김복녀 사이의 3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에서 와카타케(若竹)보통학교까지 2㎞에 달하는 통학길을 매일 뛰어다녔다. 벌이에 재주가 없던 부모슬하에서 그는 빙상선수가 되고 싶어했지만 스케이트를 살 돈이 없어 꿈을 접었다. "달리기를 하게 된 것은 돈이 한푼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는 손 옹의 회고처럼 달음박질만큼 그의 체질에 맞는 운동은 없었다. 14세 때 신의주를 휩쓴 홍수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잇기 위해 군밤장수가 되기도 했다. 간신히 복학한 손기정은 틈만 나면 달렸다.
32년 경영(京永)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며 명문 양정고보에 진학한다. 5,000m와 1만m가 주종목이었던 손기정은 이해 LA올림픽에서 김은배(金殷培)가 6위에 오른 데 자극받아 마라톤으로 바꾼다. 35년 11월3일 도쿄에서 열린 메이지신궁(明治神宮)대회에서 2시간26분42초의 공인 세계최고기록을 세울 만큼 급성장한다. 시상식에서 손기정은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퍼지자 양정고보 인솔교사 김연창(金淵昌)에게 달려가 "왜 우리나라에는 국가가 없습니까. 기미가요가 조선의 국가인가요"라며 흐느껴 울었다.
손기정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가 열리기 불과 18일전 현지에서 열린 최종 선발전을 갖는 우여곡절끝에 남승용(南昇龍)과 함께 일본대표로 출전했다. 5월21일 도쿄에서 가진 최종선발전에서 한국선수 2명이 나란히 1,2위로 뽑힌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인들의 음모 때문이었다.
8월9일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19초2의 올림픽최고기록으로 우승했다. 일제강점에 시달리던 민족의 한을 쓸어버린 장거였다. 그러나 손기정은 웃기는커녕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려야 했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였던 심훈은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감격을 표현했다.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를 향해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소민족이라고 부를터이냐!"
광복 후 손기정은 지도자로서 또 한번 민족의 기개를 드높였다. 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 감독으로 출전, 서윤복(徐潤福)을 1위로 이끌었다. 50년 대회에서 함기용(咸基鎔) 송길윤(宋吉允) 최윤칠(崔崙七)이 1,2,3위를 휩쓸 때도 감독이었다. 그가 지도자로 활약하던 광복 후 10년간은 한국마라톤의 황금기였다. 이후 한국마라톤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 노환으로 시작된 투병생활 와중에서도 "황영조와 이봉주의 뒤를 이을 차세대 유망주가 없다"며 자신보다는 오직 마라톤 장래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56년 멜버른올림픽 마라톤 4위를 차지한 이창훈(李昌薰·66)씨의 부인인 딸 문영씨는 "아버님은 병환 중에도 마라톤밖에 말씀하시는 게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생전에 바라던 두 가지 소원은 보지 못하고 영면했다. 고향인 신의주를 방문하는 것과 황영조가 다시 마라톤을 하는 것을 지켜 보지는 못했지만 한국 스포츠의 거목인 그는 마지막 호흡이 멈출 때까지 영원한 마라토너로 살았다.
/박진용기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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