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영미(41·사진)씨가 미술 에세이 '화가의 우연한 시선'(돌베개 발행)을 출간했다. 그는 5년 전 유럽의 미술관을 기행한 뒤 엮은 '시대의 우울'을 펴내면서 자신이 시인일 뿐 아니라 미술사를 전공한 미술학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렸었다."사는 만큼 보인다." 그의 시선의 초점은 이 문장에 맞추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쌓아온 삶 위에서, 기원전·2,000년의 이집트 미술로부터 헬레니즘과 르네상스, 바로크, 네덜란드 미술, 19세기·20세기 회화에 이르는 서양미술사를 훑는다. 기원전 1,850년 경 이집트 왕 산우레스트 3세의 초상은 최씨에게 상처받기 쉬운 얼굴로 보인다. 압도적이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지만 아름답다. 깨진 파편의 얼굴 앞에서 시인은 속삭인다. "그처럼 진정한 고통을 아는 투명한 권력이라면 기꺼이 그 앞에 머리숙일 겁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의 하나인 베르메르의 '연애편지'는 한 손에 악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편지를 든 여자를 그린 것이다. 여자는 그러나 편지도 읽지 않고 악기도 타지 않은 채 창 밖을 보고 있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여자를 한 순간의 시선으로 붙잡았을 것이다. 화가도 죽고 화가가 그린 그림 속 여인도 죽었다. 400년이 지난 뒤 남아 있는 것은 한 미술학도 시인이 찾아낸 '화가의 따뜻하면서도 잔인한 시선' 뿐이다.
'제니의 초상'이라는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걸작으로 꼽히는 것은 아니다. 최씨는 그러나 시인의 눈으로 이 그림을 새롭게 조명해 사람들에게 선보인다. 현란하고 낭만적인 화풍으로 잘 알려진 들라크루아가 그린 하녀 제니는 근엄하고 단조로웠다. 화가가 "눈 먼 헌신 그 자체"라고 칭찬했으며 세상을 떠나면서 5만 프랑의 유산과 가구를 남긴 하녀는 그의 주인과 어떤 관계였던 것인지, 살그머니 독자들의 호기심을 떠본다.
엘 그레코의 '톨레도 풍경'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의 그림을 좋아했다던 그가 이제는 모네나 터너의 작품 같은, 여유롭고 안정적인 풍경화를 동경하게 됐다고 한다. 19세기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가 제작한, 사치스럽고 고요해 보이는 '목이 긴 병'에 푹 빠졌다. 장식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그가 이제 "적당한 장식은 삶의 양념"이라고 적는다. "아무튼 전 변했어요. 변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 화사한 꽃병들이 눈에 띄었던 겁니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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