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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 한니발·나폴레옹이 있다면 우리엔 高仙芝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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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 한니발·나폴레옹이 있다면 우리엔 高仙芝가 있다

입력
2002.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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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년 7월 당의 병사 7,000여명이 4,694m 높이의 탄구령을 넘고 있었다. 탄구령은 힌두쿠시산맥의 한 자락으로 1년 내내 얼음이 덮여있는 험산중의 험산. 병사들은 이 고개를 넘어 지금의 파키스탄 북부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정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살인적인 추위에 고산병까지 찾아오면서 호흡불안과 극심한 두통으로 하나 둘 쓰러진다. 기진맥진한 병사들은 불평을 쏟아냈다. "장군, 안되겠습니다. 말머리를 돌려야 합니다." 장군은 들은 체 만 체 전진을 명령한다. 겨우 고갯마루에 올라선 병사들은 또 한번 새파랗게 질린다. 깎아지른 절벽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불만이 극에 달할 무렵, 일단의 군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희들은 장군께서 도모하시고자 하는 소발률국 아노월성호(아노월성에 사는 오랑캐)입니다. 항복을 청하고자 합니다." 적이 제 발로 찾아와 항복하는 걸 보며 병사들은 환호를 질렀다. 불만과 공포가 날아가고 사기도 충천했다. 장군은 야릇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사실은 장군이 심복을 위장시켜 항복하라고 시켰던 것이다. 연극의 효과는 놀라워서 사기가 오른 병사들은 노도처럼 소발률국을 점령했다. 이 장군이 바로 고선지(高仙芝·?∼755)였다.

영국의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이 한니발, 나폴레옹과 견줄 인물로 평가하고 미국 인디애나대 크리스토퍼교수가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은 이가 바로 고선지이다.

지배선(池培善·55)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쓰고 문화재 디지털복원전문가 박진호(朴鎭浩)씨가 도판을 덧붙인 '유럽 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청아출판사 발행)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일대기다.

고선지가 당에 온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저자는 아버지 고사계(高舍鷄)가 고구려 패망(668년)으로 당에 잡혀온 뒤 집단 거주지에서 고구려 여인과 결혼해 낳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버지는 무인으로서 기량이 출중해 당에서도 인정받았으며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당의 가장 서쪽 안서(安西)도호부에 배치됐다. 고선지 역시 말타기, 활쏘기에 능해 이미 스무살에 기동타격대 지휘관에 임명되고 승진을 거듭했다.

고선지가 집중적인 관심을 받은 시기는 747년이다. 현종이 토번(吐蕃)정벌 사령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토번은 파미르고원의 주요 계곡을 장악하고 인근 20여 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있어 당은 이를 반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1만여 병사를 이끌고 안서를 출발한 고선지는 파미르고원,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4개월만에 연운보(連雲堡·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사르하드)에서 첫 전투를 벌인다. 고선지는 속전속결, 게릴라전법을 통해 10만명이나 되는 토번군을 물리친다. 다시 토번의 속국 소발률국을 향해 험한 탄구령을 넘은 고선지는 직접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소발률국 왕, 왕비를 포로로 잡아 귀국한다.

이 전쟁 이후 대식(大食·압바스왕조의 이슬람제국) 등 서방 72개국이 당에 충성을 맹세했으니 그 성과가 대단했다. 750년에는 석국(石國)을 정벌, 왕을 포로로 잡아왔다. 석국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 있던 나라로 이슬람과 가까웠고 당에 조공을 게을리 했었다. 이 같은 고선지의 활약으로 당은 서역에 대한 확고한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석국의 왕이 장안(長安)에서 피살되자 아랍세계가 공분(公憤), 사라센을 중심으로 한 연합세력이 안서도호부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 다시 고선지가 나서 중국과 서방의 최초의 전투, 탈라스전투를 벌인다. 승승장구하던 고선지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탈라스강가에서 포위되고 휘하 부대마저 반란을 일으켜 대패한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부하 가운데 제지, 화약, 나침반 기술자가 있었는데 이들이 종이, 화약, 나침반 만드는 기술을 사라센과 유럽에 전파하고 그것은 서양 문명의 밑바탕이 됐다. 저자가 고선지를 '유럽 문명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겨우 목숨을 건진 고선지는 은거 생활에 들어가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반란 진압 사령관에 기용된다. 작전 과정에서 고선지는 섬주(陝州)에서 전략적으로 방어가 쉬운 동관(潼關)으로 병사를 퇴각시킨 뒤 반란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고선지 역시 안록산과 마찬가지로 이민족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당에 위협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온 정적들은 그가 뱃놀이나 즐기고 왕명을 어긴 채 퇴각했다는 보고를 현종에게 올린다.

그는 결국 칼잡이 100명을 몰고 온 환관 변령성(邊令誠)에 의해 목이 잘린다. 이 때 고선지는 저항을 하지 않고 숙명처럼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동관이 함락되고 장안도 안록산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고선지의 역할은 그만큼 막대했다.

고선지에 대한 단행본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의 발간은 의미가 크다. 최근 서양에서 고선지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는 반면 우리는 연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고선지에 대한 사료가 부족한데다 '자치통감' '구당서' 등 고선지를 악의적으로 그린 중국 저서가 많아 생생한 복원에는 한계가 있다. 사료의 진위 검토에 많은 비중을 두는 등 저자가 적지 않은 품을 들인 점은 높이 살 만하나 구성이 산만하고 스토리 전개가 밋밋해 평전으로서의 재미는 다소 떨어진다.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국내에 몇 안되는 고선지 전문가로 '고구려인 고선지' 등의 논문이 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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