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11월 선적분 이후의 중유 공급 중단을 결정하고 경수로 등 다른 활동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함에 따라 1994년 제네바 핵 합의가 백지화의 위기를 맞고 있다.KEDO의 집행 이사국들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핵 합의의 파기나 무효 등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네바 핵 합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대북 중유공급과 경수로 건설 사업의 중단과 재검토 결정은 사실상 그 합의가 생명을 다했음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합의의 한쪽 당사자는 핵개발 중단 약속을 어기고 다른 당사자는 그를 이유로 중유 공급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함으로써 양쪽을 묶는 끈이 사라진 셈이다.
이는 곧 1994년 이래 한반도 안정의 토대를 이뤄 온 기본틀이 없어지게 된다는 상황을 의미한다. 북한이 제네바 핵 합의에 의해 동결된 영변 핵 시설을 재가동하는 등 극단적으로 반응할 경우 한반도에 다시 과거와 같은 핵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북한이 사용후 플루토늄 연료봉의 봉인 상태를 감시하고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을 추방하는 등 조치를 취할 경우 북미 관계의 긴장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이날 발표된 성명의 내용은 철저히 미국의 주장이 관철된 결과이다. 미국은 이미 북한으로 향하고 있는 11월분 중유의 회항 사태만은 없어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경고와 제재의 의지를 성명에 담아 냈다.
한국측은 미국에 11월 중유분을 예정대로 공급하도록 함으로써 북한에 핵 개발 포기를 유도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한 것을 이번 회의의 성과로 꼽았다. 하지만 미국은 중유 공급의 전제로 핵 개발의 '완전하고 영구적인' 제거, '가시적이고 검증가능한'방법의 수용, '구체적이고 신뢰할 만한' 조치의 시행 등 까다로운 조건들을 겹겹이 쳐두었다. 북한이 다음 KEDO 이사회가 열리는 12월 중순까지 이런 조건을 충족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워싱턴의 전문가는 "조지 W 부시 정부와 공화당은 결국 빌 클린턴 전 정부와 민주당이 체결한 제네바 핵 합의를 폐기 또는 수정하려는 당초의 입장을 관철해 가고 있고 관철할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은 스스로 제네바 핵 합의를 어기고 이를 시인함으로써 이런 움직임에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뉴욕=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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