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LA올림픽 폐회식이 열리던 날 손기정(孫基禎)은 목이 메었다. 대회조직위가 초청한 8명의 역대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그는 메인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10만 관중에게 맨 먼저 소개됐다. "손기정, 코리아!" "기테이 손(손기정의 일본이름)"이 아닌 분명 한국의 손기정이었다. 이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우승자 손기정으로 불린 것은 처음이었다. 손기정은 생전에 당시를 떠올리며 "이것으로 비로소 나의 길고 긴 싸움은 끝났다"고 회상했다.42.195㎞의 고독한 달음박질을 평생의 업으로 여겼던 손기정은 파란 많은 삶을 살았다. 1912년 평북 신의주에서 잡화점을 하던 아버지 손인석, 어머니 김복녀 사이의 3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돈벌이에 별 재주가 없던 부모슬하에서 손기정은 그저 노는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빙상선수가 되고 싶어했던 손기정은 스케이트를 살 돈이 없어 소망을 접었다. 집에서 2㎞쯤 떨어진 와카타케(若竹)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기를 하게 된 것은 돈이 한푼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는 손기정의 말처럼 달음박질만큼 그의 체질에 맞는 운동은 없었다. 14세 때 신의주를 휩쓴 홍수 때문에 손기정은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잇기 위해 군밤장수가 되기도 했다. 간신히 복학한 손기정은 틈만 나면 달렸다.
32년 경영(京永)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며 명문 양정고보에 진학한다. 5,000m과 1만m가 주종목이었던 손기정은 그해 LA올림픽에서 김은배가 6위에 오른 데 자극받아 마라톤으로 전향한다. 35년 도쿄에서 열린 메이지신궁(明治神宮)대회에서 2시간26분42초의 세계최고기록을 세울 만큼 급성장한다. 시상식에서 손기정은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퍼지자 양정고보 인솔교사 김연창(金淵昌)에게 달려가 "왜 우리나라에는 국가가 없습니까. 기미가요가 조선의 국가인가요"라며 흐느껴 울었다.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가 열리기 불과 18일전 일본에서 열린 최종 선발전을 거쳐 남승용(南昇龍)과 함께 일본대표로 출전한 손기정은 8월9일 2시간 29분19초의 올림픽최고기록으로 우승했다. 일제강점에 시달리던 민족의 한을 쓸어버린 장거였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였던 심훈은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감격을 표현했다.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를 향해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소민족이라고 부를터이냐!"
광복 후 손기정은 지도자로서 또 한번 민족의 기개를 드높였다. 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 감독으로 출전, 서윤복(徐潤福)을 1위로 이끌었다. 50년 대회에서 함기용(咸基鎔) 송길윤(宋吉允) 최윤칠(崔崙七)이 1,2,3위를 휩쓸 때도 감독이었다. 그가 지도자로 활약하던 광복 후 10년간은 한국마라톤의 황금기였다. 이후 한국마라톤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손기정이 베를린에서 우승한지 56년 만인 92년 8월9일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黃永祚·32·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가 금메달을 획득하자 그는 스탠드에서 굵은 눈물을 쏟았다. 일장기를 달고 뛴 베를린올림픽 당시의 치욕이 씻겨지는 감격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2000년 노환으로 시작된 투병생활 와중에서도 "황영조와 이봉주의 뒤를 이을 차세대 유망주가 없다"며 마라톤의 장래를 걱정했다. 56년 멜버른올림픽 마라톤 4위를 차지한 이창훈(李昌薰·66)씨의 부인인 딸 문영씨는 "아버님은 병환 중에도 마라톤밖에 말씀하시는 게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 스포츠의 거목인 그는 마지막 호흡이 멈출 때까지 영원한 마라토너로 살았다.
/박진용기자 hub@hk.co.kr
■일장기 말소 마라톤우승 사진 손기정 "민족운동 상징" 계기돼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마라톤 제패를 더욱 유명하게 한 계기는 '일장기 말소' 사건이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당시 동아일보 체육기자 이길용(李吉用)의 주도로 이뤄졌다. 이길용이 손기정의 시상식장면 사진을 구한 때는 8월24일. 그는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서 발행한 화보잡지 '아사히 그라프'(1936년9월1일자)에 실린 마라톤시상식사진을 오려냈다.
손기정이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2위 하퍼가 월계관을 한 여성으로부터 받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있는 가운데 3위 남승룡은 꼿꼿이 선채 자기차례를 기다리는 사진으로 세 선수의 표정이나 자태가 매우 생생했다. 이길용은 다음날 이 사진을 편집국 간부에게 보이고 "오늘은 이 사진을 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 간부는 "조금 더 엷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은밀하게 말했다.
이길용은 훗날 동양화가로 일가를 이룬 조사부소속 전속화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화백에게 "일장기 부문을 엷게 만들어달라"고 요청했고 이상범과 사진부장 신낙균은 기술적 문제를 들어 청산가리로 아예 일장기를 완전히 삭제했다. 석간인 동아일보 8월 25일자 2면에는 일장기가 없는 손기정의 사진이 실렸다. 당시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20사단 사령부는 발칵 뒤집혔고 신문발송과 배달중지를 지시했으나 이미 태반이 발송된 상태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이길용을 비롯, 50여명이 연행됐고 8명의 기자가 구속되는 필화사건을 겪었다. 일장기말소사건은 마라토너 손기정이 민족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손기정 일화들
여자고무신을 신고 달린 사연
배고픔을 잊고 달리기에만 열중하는 아들 손기정이 안쓰러워 어머니 김복녀씨는 한가지 꾀를 생각해낸다.
여자고무신을 신기면 불편해서 달리기를 그만두지 않을까라는 희망으로 손기정에게 일부러 여자고무신을 신겼던 것. 그러나 손기정은 잘 벗겨지는 여자고무신을 새끼줄로 묶고 달렸다.
세계최초로 2시간25분대 진입
손기정은 1935년 4월27일 조선육상경기협회가 주최한 마라톤대회서 2시간25분14초의 기록으로 골인, 일본육상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시 2시간25분대의 기록은 인간체력의 한계를 초월한 경이적인 기록으로 여겨졌다.
더구나 기록이 좋으면 경기가 끝난 후 코스가 짧아서 좋았을 것이란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 대회주최측이 일부러 520m를 더 늘려 잡았는데도 손기정은 2시간25분대의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육상경기연맹은 자기들이 공인한 코스가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기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달 전인 3월21일 메이지신궁 신코스 마라톤대회서도 손기정은 2시간 26분14초로 우승하지만 일본육상경기연맹은 코스의 정식실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인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7개월후인 11월3일 열린 제8회 메이지신궁대회서 당시 세계최고기록인 2시간 26분42초로 우승하자 일본측도 공인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인은 '손긔졍 KOREA'
베를린 올림픽 출전당시 독일에서는 일본선수들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손기정은 사인요청을 받으면 주저없이 한글로 '손긔졍 KOREA'라고 적었다. 때로는 손긔졍 KOREA 옆에 한반도를 그려넣기도 했다. 외국인이 "어디서 왔소" 라고 물으면 꼭 "KOREA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사인하기로 되어있는 독일 국빈방명록에도 '손긔졍'이라고 한글로 뚜렷이 적었다. 한글을 잘 모르는 일본인들이 손기정에게 어째서 그런 어려운 글자로 사인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손기정은 "한자로 이름을 쓰면 획이 많아 시간이 걸리지만 한글로 손기정이라고 쓰면 간단하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해 그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난생 처음보는 태극기
일본선수단 본부는 마라톤 금메달 수상축하파티를 열려고 준비를 갖췄으나 정작 파티의 주인공 손기정과 남승용은 선수촌을 빠져나가 당시 베를린에 살고 있던 안중근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씨 집에서 조촐한 축하연을 갖고 있었다.
안봉근의 서재에 들어선 손기정과 남승용은 그 방에 걸려있는 태극기를 난생처음 보게 된다.
● 손기정 연보
1912년 5월12일 평북 신의주시 남민포동 출생
33년 제3회 동아마라톤 우승
35년 11월 베를린올림픽 일본대표 선발전 우승(2시간26분14초)
36년 8월9일 제 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우승(2시간29분19초·올림픽 최고기록)
37년 양정고보 졸업
40년 일본 메이지(明治)대 법대졸업
45년 남승용 등과 마라톤보급회 결성
47년 보스턴마라톤 서윤복 우승(선수단 감독)
48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50년 보스턴마라톤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1∼3위 석권(선수단 감독)
57년 대한민국체육상 수상
63년 문화공로상 수상
63∼65년 대한육상경기연맹회장
66년 제6회 방콕아시안게임 한국선수단 단장
68년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공로상 수상
70년 국민훈장 모란장
79년 한국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81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
82년 국제육상경기연맹 창립 70주년 특별기념상
87년 비킬라 아베베상 수상
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성화 최종주자
95년 올림픽 100주년기념 아테네마라톤대회에 특별초청 참가
96년 베를린올림픽 60주년 기념행사(현지)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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