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학생들이 공부를 등한시 한 당연한 결과다."(교육당국 및 입시전문기관), "재학생은 수능 난이도 조정의 모르모토가 아니다."(고3 수험생 및 학부모)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나고 4년제 대입 정시모집 요강이 확정되는 등 본격적인 입시철로 접어들었지만, 가채점 결과 드러난 재학생 학력저하 논란은 오히려 가열되고 있다. 입시 전문가들은 재학생 점수가 재수생보다 평균 20점 가량 낮다는 가채점 내용을 제시하면서 "고3생 학력저하가 명백하다"고 입을 모은다. 반면 재학생들은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 수능시험을 출제했어야 옳았다"며 '학력저하' 운운에 못마땅하다는 반응이다.
학력저하 근거는 있나
재학생 학력하락 근거는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가채점 결과에서 찾을 수 있다. 6일 수능 후 입시기관들은 수능성적이 작년보다 평균 10점 이상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다음날 평가원이 6만명의 수험생 점수를 직접 가채점한 결과는 정반대였다. 평균 점수가 오르기는 커녕 전체적으로 2∼3점 떨어졌다.
뒤늦게 원인분석에 나선 입시 전문기관은 재학생 학력수준을 감안하지 않는 바람에 이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대성학원 이영덕(李永德) 평가실장은 "재수생은 상·중·하위권 관계없이 골고루 점수가 올랐고, 20∼30점까지 점수가 오른 경우도 꽤 있었다"고 말했다. 재학생 학력저하 이외에는 점수 하락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일선 학교의 자체 가채점에서도 모의고사때보다 성적이 떨어진 학생이 많게는 한반에 80%이상이나 되는 등 점수하락이 두드러졌다. 지난해 380점 이상 고득점자가 5명이었던 서울 경기고의 경우 가채점에서 380점 이상이 한명도 없었으며, 지난해 8명이었던 370점대는 5명에 그쳤다.
'원인은 뭔가' 공방 치열
재학생과 진학지도 교사, 학부모들은 고3생들의 학력이 예년에 비해 다소 떨어졌다는 점은 대체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학력저하의 기준을 오로지 수능 성적 하락에서 찾는 시각에 대해서는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있다.
서울고 김태영(金太榮)군은 "교육당국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재학생 학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정확한 목표가 없었고, 수능 난이도 조절에만 너무 집중됐다"고 꼬집었다. 숙명여고 김정훈(金政勳) 교사는 "재수생 점수가 높은 이유는 수시나 내신에 신경써야 하는 재학생과 달리 수능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능에만 전념한 재수생과 수시모집 내신 특정과목 등에 매달린 재학생간에 점수차가 나는 것은 당연하며, 이를 '재학생 학력저하'로 곧바로 몰아가는 것은 억지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교육당국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수능이 고3생들의 학력수준을 진단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점수가 학력저하 여부를 말해준다는 해석이다. 수능 출제를 총괄했던 조승제(趙升濟) 서울대 교수는 "이 정도 (수능시험) 수준의 문제를 어렵게 느낀다면 이는 학생들의 학습능력의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학력저하 논란, 타당한가
이런 가운데 일부에서는 몇 점의 점수로 '학력저하'와 '난이도 조절 실패'를 논하는 자체가 문제라는 비판도 제기되고있다. 서울대의 한 교수는 "시험이 어렵다거나 쉽다는 이분법적 관점은 잘못됐다"며 "교육목표에 적절한 문항이냐 아니냐를 평가하는 논의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지적했다. 서울 D고 이모(47)교사도 "학력저하 현상에 대한 실체를 명확히 규명해야 할 시기가 됐으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학습지도에 대한 대대적인 혁신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 "학력저하"원인은
재학생 학력저하의 단적인 증거는 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 시험 가채점 결과에서 찾을 수 있다. 입시 전문기관들이 응시자들을 대상으로 가채점한 결과 올 수능 점수가 전체적으로 작년보다 평균 2∼3점 하락했지만, 재수생은 오히려 높아졌기 때문이다.
종로학원의 '재수생 표본집단의 지난해 대비 점수 상승폭'에 따르면 이번 수능에 응시했던 재수생들의 성적이 10∼20점 안팎 상승했다. 지난해 375점을 받았던 최상위권 재수생의 경우 이번에 인문계 387점, 자연계 383점으로 각각 12점과 8점이 뛰었고, 지난해 365점을 받은 수험생들은 인문계 21점, 자연계 15점이 상승했다.
특히 중·하위권일수록 점수가 대폭 올랐다. 지난해 320점대는 인문계 30점, 자연계 26점, 하위권인 270점대는 인문계 34점, 자연계 41점이라는 높은 상승세를 보였다.
재수생 강세는 9월3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실시한 모의고사에서 이미 예견됐다. 총점 기준 전체 수험생 집단의 재수생 평균성적은 고3 재학생보다 인문계 58.7점, 자연계 72.1점, 예·체능계 54.6점이나 높았다.
입시 전문가들은 재수생과 재학생 학력차이의 가장 큰 원인으로 '학생부 절대평가제'를 지목하고있다. 일선학교는 '수' 받는 학생을 늘리기 위해 시험을 쉽게 출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60문제를 가르쳐주고 이중 30문제를 출제하는 식의 시험도 다반사여서 고3생들은 약간만 어려운 문제가 출제돼도 당황한다는 분석이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 전문가 의견
누구나 아프면 병원을 찾는다. 병을 제대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고등학교 재학생들의 성적하락이 예상되는 가운데, '단군이래 최저학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학력저하가 심각하다고 모두가 우려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교육이 큰 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도 교육에 대한 병을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전문적인 교육평가체제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정말 병에 걸렸는지 여부가 불분명하고, 원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때때로 중세시대의 마녀사냥과 같이 애꿎은 희생양을 만들기도 한다. 그 희생양이 때로는 교사가 되기도 하고, 학생이 되기도 하고, 학부모가 되기도 하고, 혹은 교육부가 되기도 한다.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교육분야가 큰 병에 걸려있다면 이는 국가적인 위기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병에 걸렸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치료하는 방식이 지나칠 정도로 임의적이고 비과학적이다. 그러므로 정말 병에 걸렸는지, 걸렸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체계적이면서도 전문적으로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교육평가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 예컨대, 1969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미국의 국가교육성취도평가(NAEP)나 1989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영국의 국가교육과정평가(NCA)와 유사한 전문적인 교육평가체제를 우리도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
막연한 불안감과 임의적인 처방은 병을 치유하기보다는 더욱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전문적인 교육평가체제를 구축하여, 학생들의 학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이 저하되고 있는지 상승되고 있는지, 그러한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과학적이면서도 전문적으로 진단하고 적절한 처방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요컨대, 오늘의 국가적 교육 위기 상황에서 전문적인 교육평가체제의 구축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백 순 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 고3학생의 반박
"우리를 보고 단군 이래 가장 학력이 떨어지는 세대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 기준이 뭐죠?" 서울 강남 S고교 3년 김준호(18·가명)군은 최근 일고 있는 학력저하 논쟁에 대해 "낮은 수능 점수가 문제라면 그것은 분명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교육당국의 책임"이라고 반박했다. 낮은 수능 점수는 현행 입시제도와 학교 교육 안에서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입시에서 내신의 비중이 커지고 절대평가로 바뀌면서 학교마다 학생들의 내신을 높이기 위해 3년 내내 쉬운 문제만 출제해 왔어요. 그래서 대부분 쉬운 문제에만 익숙해져 왔고 교육당국도 거듭 '쉬운 수능'을 약속해오던 터라 어려운 문제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그런데 난이도 조정에 실패해 결과가 이렇게 나오니까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하고 있는 거죠."
김군은 "이런 상황 속에서 재수생 강세는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다. 재수생이 1년 동안 수능 하나에만 매달리는 반면 재학생들은 내신에 신경 써야 하고 또 학교에서 마음대로 모의고사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김군은 5년전 자신을 들뜨게 했던 꿈같았던 약속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무엇이든지 한가지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이제 와서 왜 수능점수 하나 갖고 학력이 저하됐다고 소란을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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