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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빛 좋은 개살구

입력
2002.1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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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출신으로 공정거래위원회에 들어가 주요 국장을 지내고 올봄 퇴임한 변호사의 행정 현장 비판서가 화제다. 행정부의 무사안일주의와 극심한 무능력을 비판한 저서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체험이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책 내용 중에서도 우리 정부의 능력이 '법률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는 수준'이라는 대목은 충격적이다."다행히 일본에 비슷한 법률이라도 있으면 번역해서 쓴다. 하지만 이럴 때조차 밥그릇을 챙기려는 담당부처의 의도로 이상한 조항이 들어간다. 여기에 부처간 협의와 국회 심의까지 거치면 법안은 손대기 힘들 정도로 기형화한다."

눈을 먼 데로 돌릴 필요도 없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까지 경제자유구역법(경제특구법)을 놓고 벌어진 논란과 손질은 우리 행정부와 국회의 현주소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사례연구감이다.

재정경제부가 8월 입법 예고했던 경제특구 법안은 노동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교육여건을 개선해 외국기업을 유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항만과 공항을 끼고 있는 지역을 지정해 각종 세금을 대폭 깎아주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외국인 학교도 세워 교육문제가 외국기업 유치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특구안의 골자였다.

그러나 법 초안이 만들어지자마자 정부 내에서조차 부처간 이기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총론에서 찬성하던 교육부와 노동부는 각론으로 들어가면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교육부는 외국인 학교의 설립·입학 조건 완화에 반대했고, 노동부는 월차·생리휴가 폐지와 파견근로제의 무제한 허가가 평등권에 위배된다며 반발했다.

재계는 재계대로 외국기업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은 국내기업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입장이었고, 노동계는 특구내 노동규제 완화가 노동권을 박탈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특구 설치가 우리나라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처음의 공감대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1차적 책임이 각계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고, 정치권과의 논의를 원만하게 진행하지 못한 정부에게 있음은 물론이다.

입법 예고 후 2개월간 원안에 수정에 수정이 가해졌다. 이 과정에서 각종 노동 및 교육 관련 규제를 풀겠다는 당초의 안은 흔적도 없어졌다. 파견 근로자 고용은 특구 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고, 외국인학교는 외국교육기관에 한해서만 설립할 수 있도록 설립자격 요건이 까다로워졌다. 정부의 수정안은 국회 상임위 심의과정을 거치면서 또 한 번 변질됐다. 국회 재경위는 특구 지정요건을 '교통 통신 용수 전력 등 기반시설을 갖춘 곳'으로 완화해 사실상 전국 어디서나 특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전국 어느 곳이든 설치되는 특구가 특구일 리 만무하다. 경제논리에 따라 설치돼야 할 특구가 정부 부처간 이기주의와 정치권의 이해관계로 '빛 좋은 개살구'로 변한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국가경쟁력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중국 정부가 강력한 지원과 과감한 제도 개선으로 다국적 기업의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를 잇달아 유치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제대로 된 특구법 하나 만들지 못하는 나라에서 세계화와 미래를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지난해 6개였던 중국의 다국적 기업 지역본부는 10월 말 현재 40여 개사로 늘어났다. 우리가 미적거리는 사이에 제조업 기반은 물론 아시아 비즈니스의 거점 마저 중국 중심으로 굳어질 조짐이다. 외국기업의 평가도 냉정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주한 외국기업들이 평가하는 우리나라 경제특구의 종합경쟁력은 동아시아 5개 국가 중 4위였다. 특구법이 통과됐다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은 모든 정책에 우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창 민 논설위원 cm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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