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무장해제 요구 결의를 수용함으로써 최소한 한 달 간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이라크는 13일 유엔에 보낸 서한에서 안보리 결의 1441호를 조건 없이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유엔 무기사찰단이 18일 4년 만에 바그다드에 들어가 사찰을 재개하게 됐다. 하지만 이라크에 드리워진 전쟁의 암운이 걷힌 것은 아니다.▶전격 수용 배경
이라크의 결의 수용은 이미 예상됐다. 미국과 영국이 결의 수용 거부를 국제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즉각 공격하겠다고 벼르는 상황에서 이라크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랍권인 시리아를 포함해 안보리 15개 이사국이 만장일치로 결의를 채택하고, 형제국의 모임인 아랍연맹까지 결의 수용 압력을 가하는 등 국제사회의 여론도 완전히 기운 상태였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라크가 결의 수용 시한인 15일보다 이틀이나 앞서 수용 발표를 한 것이 의외라는 반응이다. 이에 대해 영국 BBC 방송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장 급한 불을 끄면서 오히려 유연한 자세를 과시함으로써 체면을 세우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12일 이라크 의회가 만장일치로 결의안을 거부할 것을 의결한 지 하루 만에 후세인이 전격 수용 결정을 내린 것도 '평화를 위해 용단을 내린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과시하려는 계산이라는 지적이다.
▶환영과 냉소로 엇갈린 반응
대부분의 국가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라크전이 주변 지역으로 번질 것이라는 공포에 떨었던 아랍연맹은 "이라크가 평화를 향한 첫 관문을 통과했다"고 안도하면서 "앞으로도 중동의 안정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해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이고리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이라크의 결정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여전히 냉소적이다. 백악관은 "후세인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서한에 담긴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폄하했다. 잭 스트로 영국 외무장관도 "이라크가 무사히 첫발을 내딛어 준 것을 환영하지만 후세인은 변덕스럽기로 악명이 높은 만큼 방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쟁의 덫 벗어날까
이라크의 발표 직후 유엔감시검증사찰위원회(UNMOVIC)와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8일부터 바그다드에서 사찰 준비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안보리 결의 1441호가 규정한 사찰 관련 시간표에 따르면 이라크는 다음달 8일까지 화생방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보유와 개발 실태를 보고해야 한다. 보고 내용이 안보리를 통과하면 유엔 무기사찰단은 늦어도 다음달 23일부터 본격 사찰을 재개하고, 내년 2월 21일까지 최종 사찰 결과를 보고하게 돼 있다.
하지만 이같은 절차가 원활히 진행돼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라크의 무장해제가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신고 내용에 대해 미국이 불완전하다고 반박할 것으로 보이며, 이라크가 미국이 만족할 만큼 사찰에 100% 협조한다는 보장도 없다. BBC 방송은 "본격적인 전쟁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이라크는 미·영의 덫을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 이라크 유엔서한 요지
미국과 영국은 우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사악하고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시오니즘과 탐욕에 빠진 시대의 폭군이다. 안보리 결의 1441호는 아주 나쁜 내용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수용하기로 했다. 우리 국민을 위해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엔 무기사찰단은 우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지 않았으며, 미·영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사찰단이 거짓말쟁이(미·영)들의 말에 놀아나는지 우리 국민이 지켜볼 것이다.
우리가 결의를 수용한 만큼 1991년 내려진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것은 안보리의 의무이다. 매일 공습을 가해 우리의 국토를 유린하고 우리의 재산을 파괴하는 사악한 마귀들을 몰아내려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존엄성, 자유와 조국을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 유엔사찰 첨단장비들
4년 만에 재개되는 유엔의 이라크 사찰에는 과거 사찰과 비교할 수 없는 최첨단 장비가 대거 동원된다. 눈과 손에서 디지털 카메라와 스파이위성으로 무장한 이번 사찰단은 지하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감지, 어느 때보다 강력한 조사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동원되는 장비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상업스파이 위성과 소형센서, 운반용 세균탐색기, 레이더 시스템 등이다. 스파이위성은 건물 공장 화약고와 같은 대형건물에 대한 사진촬영이 주 임무로, 미세한 부분까지 잡아내는 탐지능력이 뛰어나다. 소형센서는 대기 물 토양 등에서 대량살상무기와 관계된 징후가 있는지를 포착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세균탐색기는 탄저균이나 기타 생화학무기가 장착됐는지 여부를 조사하게 된다.
사찰단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레이더 시스템이다. 지표면을 뚫고 들어가 30m 지하에 있는 터널, 벙커까지 탐지할 수 있는 이 장비는 지표면의 변이(變異), 지하공간의 유무 등을 파악, 지하공간을 손금보듯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사찰단은 사찰이 중단된 1998년 이후 이라크 정부가 교묘한 방법으로 무기를 은닉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이같은 첨단장비가 4년 간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워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유엔이 사찰인력으로 양성하고 있는 250여명의 인력 중 실무경험을 갖춘 전문가가 적다는 우려도 불식시켜 줄 것으로 보고 있다.
/황유석기자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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