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기준노동분야에 대한 공약검증 기준은 우선 노사관계와 노동현안에 대한 각 후보의 관심의 폭, 인식의 정확성, 시각의 균형성이다. 또 이들이 제시한 공약들이 사회와 경제를 안정시키고 산업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을 지도 평가 항목이 된다. 이와 함께 각 후보간의 차별성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유권자들의 판단과 선택에 도움을 줘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노사관계에 대한 각 후보의 철학과 노선을 검토하고 이것이 기본적 노동정책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IMF 이후 단행된 구조조정 정책의 심각한 부산물인 빈부격차 심화와 고용불안정 문제에 대한 각 후보의 인지도와 정책대응을 비교·평가해 볼 것이다. 그리고 현재 노동시장의 핵심 현안에 대한 각 후보의 입장과 공약을 역시 비교 평가해 보겠다.
■노사관과 기본적 노동정책
이회창 후보는 기본적으로 시장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노사관계를 바라본다. 그는 법과 원칙에 근거한 자율적 노사관계를 강조하고 정부의 역할은 규칙의 공정한 집행자로 한정하고자 한다. 현 정부가 설치한 노사정위원회는 노사문제에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하도록 만들어 노동시장의 안정을 깨뜨렸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노사정위를 해체하고 대신에 전문성에 기반을 둔 정부자문기구로서 노사관계심의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공약한다. 현 정부의 개입주의적 노사정책을 대폭 후퇴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노사관계를 이처럼 노동시장 상황에 방치해 버릴 경우 쟁의행위가 더욱 빈발할 것이다. 또 이 같은 시장주의적 노동정책은 그 의도와는 달리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도 있다.
정몽준 후보 역시 시장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노사관계를 보지만 그의 노사관은 이 후보보다 더 안일하다. 그 역시 자율적 노사협상을 강조하는 한편 노사정위를 협의기구로 격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노사관계를 부부관계에 비유한다. 그러나 노사관계는 개인 대 개인의 수평적 계약관계가 결코 아니다. 정 후보의 노사관은 노동자 단결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산업화 초기단계 부르주아의 노사관과 그대로 일치한다. 조직노동의 실체를 이처럼 과소평가하고 또 노사관계를 본질적으로 사적인 영역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또 위험하다.
노무현 후보의 노선은 독일 우파의 사회적 시장경제 노선에 영국 좌파의 제3의 길 노선을 결합한 것이다. 그는 사회적 파트너십 형성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을 강조함으로써 위의 두 후보와 뚜렷이 대비된다. 그의 개입주의적 노동정책의 성패는 노동자들의 협조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얻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사실 지금까지 노사정위가 성공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던 것은 무엇보다 양대노총과 경총의 리더십이 산하 구성원들에게 합의사항 승복을 강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구조적 취약점을 내버려 둔 채 위원회의 기능과 위상만을 강화한다고 그 성공적 운영이 보장될 수 있을 지는 의심스럽다.
권영길 후보는 케인즈주의 경제노선에 북유럽 사민주의적 노동정책을 결합시킨 노동자 중심적 노사관을 뚜렷이 드러낸다. 그가 노사자율에 입각한 노사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정부 개입의 불공정성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는 경제정책 전반의 결정과정에 노동자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국내 기업의 15%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직률을 가진 노동조합이 과연 전반적 경제정책 결정과정에 개입할 만큼 대표성이 있느냐가 문제이다. 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모두 합의된 정책사항을 조합원들에게 관철시킬 만한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권 후보 역시 도외시하고 있다.
■고용안정과 빈부격차
IMF 사태 이후 단행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정책은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고용의 심각한 불안정을 초래했다. 이에 대한 각 후보의 정책적 대응방안을 살펴보자.
우선 이 후보와 정 후보는 노동시장 유연화가 우리 경제의 경쟁력과 건강성 회복에 필요한 조치라는 데 동의한다. 노 후보 역시 유연화의 불가피성을 인정하지만 무분별한 유연화에 따른 부작용을 경계한다. 반면 권 후보는 유연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에 근본적으로 반대하고 오히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더 향상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고용증대를 위한 권 후보의 정책은 케인즈주의적 재정정책에 노동시간 단축을 결합시킨 것이다.
반면 정 후보는 고용 문제 역시 시장기능에 맡겨 두자는 입장이다. 이에 비해 이 후보는 일자리 창출에 보다 적극적이다. 노 후보의 정책제안은 서구 좌파의 제3의 길 노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가장 두드러진 공약은 권 후보의 부유세 도입안이다. 그는 10억원 이상의 자산소유자들(약 2만∼5만명 추정)을 대상으로 연간 11조원 가량의 부유세를 걷어 이를 의료, 교육, 주택 등 사회정책비로 활용하겠다고 공약한다.
나머지 세 후보는 모두 부유세 도입에 반대한다. 여기서도 정 후보의 공약이 가장 소극적인 반면 노 후보의 공약이 가장 체계적, 적극적이다.
고용과 불평등 문제에 대한 공약 역시 각 후보의 이념과 노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부문에 대한 정 후보의 문제의식은 다소 안이한 편이고 정책적 대응 역시 소극적이다. 이 후보는 정 후보보다는 적극적이고 또 실현성 있는 공약을 제시하고 있지만 정책의 폭과 깊이는 노 후보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노 후보는 이 두 문제에 대해 서구 좌파의 '제3의 길'노선에 입각한 정책 제안을 내놓고 있다. 반면 권 후보의 부유세 공약은 파격적인 만큼 사회적 논란의 불씨가 될 소지가 크다.
■주요 노동현안
다음으로 공무원 노조, 주5일 근무제,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노동자, 노동자 경영참여 등 주요한 노동현안에 대한 각 후보의 입장을 비교해 보자. 우선 공무원 노조의 경우 권 후보와 다른 세 후보의 견해가 명확하게 나뉘어진다. 반면 주5일 근무제의 경우 후보 별 견해차가 가장 두드러진다. 비정규직 근로자와 외국인 노동자 문제의 경우 권 후보의 대응이 가장 강경하고 정 후보의 공약이 가장 추상적이다. 노동자 경영참여에 대한 권 후보의 공약은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임금수령자기금'안에 기초한 것이다. 반면 노 후보의 경영참여 지지 근거는 훨씬 우파적이다.
결국 이 영역에서도 권 후보의 차별성이 가장 두드러진다. 각 현안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일관되게 노동자 중심적이며, 혁신적이며, 또 비타협적이다. 노 후보 역시 기본적으로 노동자 편에 서서 정책을 제시하지만 현실과의 타협을 동시에 모색한다.
이 후보는 그의 노사관에 비해 다분히 전향적인 입장을 표명한다. 그러나 그의 공약은 대체로 점진적이고 장기적이다. 노동자 표를 의식한 임시방편적 공약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하는 부분이다. 현안들에 대한 정 후보의 공약은 대체로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고 많은 경우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
■종합평가
노동문제에 대한 각 후보의 견해와 공약들은 대체로 각 후보의 이념적 성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 노동자에 대한 편향성은 권 후보, 노 후보, 이 후보, 정 후보의 순서로 뚜렷이 드러난다.
권 후보의 노동자 중심적 정책과 공약은 비타협적이고 또 국민경제 전반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권 후보의 실제 당선가능성이 크지 않다는데 기본적으로 연유한다. 만약 그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면 민주노동당은 훨씬 더 책임감 있고 타협적인 정책과 공약을 제시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현 단계 민주노동당의 목표는 핵심 지지세력인 노동자의 지지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권 후보의 공약은 비록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전술적 타당성은 인정 받을 수 있다.
노 후보의 공약은 노동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하되 현실적 한계를 무시하지 않으려는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다만 현재 노동시장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정책은 노동조합 지도부의 리더십과 판단력에 대한 낙관적 기대에 지나치게 기초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노동문제에 대한 이 후보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소극적이다. 노사문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가급적 자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현안이나 고용 문제에 대한 그의 공약들은 전향적이다. 이 공약들은 또한 점진적이고 장기적이다. 이 후보의 포괄적(catch-all) 선거전략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 후보의 정책과 공약은 네 후보 중 구체성을 가장 결여하고 있다. 노동문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에 대한 정 후보의 인식이 충분하지 못함을 반영한다.
김수진(金秀鎭)·서울대 사회과학대 졸·미국 UC버클리 정치학 박사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소장·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핫이슈 / 주5일근무제
"우리 나라에서 근로기준법을 바꾸는 것은 헌법을 개정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노동계와 경영계 관계자를 참고인으로 출석시켜 주5일 근무제에 대한 최종의견을 들은 이달 5일 방용석(方鏞錫) 노동장관은 이렇게 푸념했다. 우리 사회에서 점차 대세를 이뤄가고 있는 주5일 근무제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근로기준법 개정이 필수인데, 이 법 자체의 속성상 노사 양측의 요구를 무리 없이 반영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주5일 근무제는 1998년 2월 노사정 대타협으로 논의를 시작한 뒤 현 정부 내내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노사는 2000년 10월 주40시간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합의문을 채택한 뒤 100여 차례 회의를 거쳤지만 시행시기와 임금보전 등 핵심쟁점에 대해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4년 이상 제자리 걸음을 해왔다.
급기야 올해 7월 정부가 나서 10여 차례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거친 뒤 어렵게 정부안을 마련해 국회로 넘겼으나, 여야는 "노사 양측으로부터 돌을 맞기 싫다"며 처리를 유보했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노사양측 어디든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주5일 근무 법안은 일단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상태지만 대선 직후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와 관련, 노동부는 "내년 1, 2월 임시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도록 총력을 쏟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법개정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내년 봄 노사간 단체협약 때 노동시간 단축 문제로 노사분규가 심화할 수 있는 데다, 사업장별로 왜곡되거나 편법적인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 법 개정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운다.
주5일 근무제에 대한 대선 후보들의 견해는 비교적 명쾌하다. 이회창 후보는 "노사간의 자율적 합의가 아닌 입법을 통해 모든 사업장에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법제화는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쪽이다. 정몽준 후보는 주5일 근무제가 대세인 것은 인정하지만 기업규모에 따라 노사합의를 토대로 단계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노무현 후보는 현행 정부안의 기본골격에 찬성하고 있다. 일부 논란이 있으나 일단 도입한 뒤, 문제점이 드러날 경우 보완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면 전체 사업장에 적용하는 시가는 정부안(2010년) 보다 단축해서 차기 대통령 임기중에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
권영길 후보의 입장은 가장 강경하다. 그는 현행 휴가일수를 유지하면서 임금 삭감도 없는, 주5일 근무제의 전면적이고 즉각적인 시행을 주장하고 있다.
/김성호기자 shkim@hk.co.kr
■정책을 만든 사람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노동 분야 정책 개발은 당내 노동계 출신 의원들이 담당했다. 노동운동가 출신 김문수(金文洙) 의원은 자칫 보수적으로 흐를 수 있는 한나라당의 노동정책이 균형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노총 부위원장을 지낸 김락기(金樂冀) 의원은 공약에 노동계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애썼고, 노동부 관료 출신이면서 제3정조위원장을 거친 전재희(全在姬) 의원과 최승부(崔勝夫) 전 노동부차관도 공약 개발에 참여했다. 학계에서는 이회창 후보의 정책특보인 안종범(安鍾範) 성균관대 교수, 김태기(金兌基) 단국대 교수가 깊이 관여했다. 특히 김 교수는 전체적인 틀을 짜고, 세부적인 내용을 공약까지 가다듬었다. 외부 자문팀과의 조율 등 실무적인 작업은 허미연(許美蓮) 수석전문위원이 맡았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정책은 실전경험과 이론의 결합을 통해 완성됐다. 우선 노 후보 자신이 노동운동과 국민의 정부 초기 노사정위원회에 간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주5일 근무제, 공무원노조 등의 문제에 대한 기조를 제시했다. 자문교수단 산하의 '노동정책팀은 실무를 맡아 구체적인 공약으로 살을 붙였다.
정이환(丁怡煥) 서울산업대 교수가 팀장이고 산업연구원 출신 박태주 노동특보가 간사를 맡은 노동정책팀은 학계·연구소 출신 7명과 노조의 정책개발자 3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팀에서 정 교수는 노동시장과 비정규직 문제를, 박 특보는 노사문제를 담당했으며 한국노동연구원, 노사정위원회측 인사들의 조언도 수시로 들었다. 당내에서는 한국노총 위원장 출신인 박인상(朴仁相) 의원이 정책 전반을 검토했다.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 캠프에는 전 현대그룹 노조위원장 등 노동계 인사가 다수 포진해 있다. 그만큼 정 후보의 노동정책에는 산업현장의 목소리가 상당부분 반영돼 있다.
민주노총 사무총장 및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 의장을 지낸 권용목(權容睦) 당 노동특별위원회 정책위원이 정 후보를 보좌하면서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당무위원인 배일도(裵一道)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위원장은 정 후보에게 노동현장의 여론과 문제점을 전달하고 있다.
조재호(趙宰浩) 울산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동관련 공약을 개발하는 총괄 지휘자이며 한국산업노동정책연구소장을 지낸 도천수(都天洙) 시민사회특보는 노동·시민단체와의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노동정책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여기에 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인 김준용(金準龍) 노동특위 위원장이 공약에 대한 검증작업을, 이원건(李元健) 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이 노동관련 조직업무를 맡고 있다.
/최성욱기자 feelchoi@hk.co.kr 배성규기자 vega@hk.co.kr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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