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는 암울한 시대상으로 인해 술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식인들의 자조적인 분위기가 잘 묘사돼 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술은 현실의 괴로움과 고통을 완화시키는 위무제 역할을 해왔다. 보들레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술은 '인공낙원'으로 가기 위한 가교이자 촉매제다. 특히 예술가들에게 술은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는 천재성과 영감을 끄집어내는 묘약이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가 쓴 '알코올과 예술가'에는 술독에 빠진 예술가들의 취생몽사(醉生夢死) 백태가 잘 그려져 있다.■ 최근 시인 고은이 한 문예지에서 "요즘 술 먹는 시인이 없다"고 질책한 것도 시와 술의 전통적인 어울림의 자리가 없어진데 대한 애석함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시인들에게 술은 세상사의 관습과 박제가 된 삶의 남루한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영약인지도 모른다. 그의 일갈은 통음할 용기조차 없이 시를 쓰고 있는 요즘 시인들의 영악함과 지나친 보신주의를 질타하는 죽비소리처럼 들린다.
■ 하지만 고은 시인의 개탄과는 달리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주량은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세계 보건기구(WHO)가 1월 발표한 '15세 이상 1인당 알코올 소비량''조사자료(96년 기준)에 따르면 한국인의 1인당 술 소비량은 14.4㏄로 슬로베니아(15.1㏄)에 이어 세계 2위다. 슬로베니아가 와인과 맥주를 많이 소비하는걸 감안하면, 독주(毒酒) 소비량은 한국이 단연 으뜸이다. 아마도 술자리마다 등장하는 폭탄주가 1등 공신인 듯 하다. 연말 대선과 동창회, 망년회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술 소비량은 절정에 달하게 될 것이다.
■ 다음 주에는 올해 수확한 포도로 담근 첫 포도주 보졸레 누보가 출시된다. 프랑스 남부 부르고뉴 지방의 보졸레 지역에서 햇포도를 단기 숙성시켜 만든 이 적포도주는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에 전세계에서 동시 출시된다. 이 행사는 마케팅과 홍보전략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포도주를 자주 마시는 프랑스인들의 심장병 사망률이 낮다는 소위 '프렌치 패러독스'가 홍보의 포인트였다. 보졸레 누보 출시로 포도주를 많이 마시게 돼 독주 소비량이 준다면 '코리안 패러독스'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창민 논설위원 cm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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