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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 취업난 / 가방끈 길면 취업 더 안되는 기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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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 취업난 / 가방끈 길면 취업 더 안되는 기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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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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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사 출신인 K(25)씨는 며칠 전 큐레이터로 일해온 미술관에서 '자리가 없어졌다'는 통보를 받았다. 디자인 전공인 그는 5개월 전 한달 40만원을 받기로 하고 그곳에 취업했다. 지금 그는 유학을 생각하지만, '가방 끈이 길면 취업하기가 더 어렵다'는 주위 만류로 고민하고 있다.독일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얼마 전 돌아온 40대의 또 다른 K씨. 직업인으로서 그가 선택한 것은 '서울의 택시 운전사'다. 대학강단에 서고 싶지만 강사료는 생활비 대기에도 모자라고, 자리도 나지 않는다.

반도체 연구로 외국학술지에 논문까지 실려 20대 박사가 된 M(31)씨는 그나마 나은 경우다. 유명 반도체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직급은 대리. 직급도 직급이지만 일반 직원들은 '박사'라며 그를 멀리하고, 주어진 일은 단순한데다, 연봉도 생각보다 박하다. 요즘 그는 학원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사설학원 1번지' 대치동을 비롯해 서울 강남 학원가에 가면 M씨 같은 석·박사 출신 해외 유학파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해외인재를 잡겠다'며 스카우트(채용) 출장에 열을 올리는 대기업 간부들의 모습은 유학생들에게 소리만 요란한 호들갑으로 비쳐진다. 미국 내 톱10에 드는 시카고대 MBA(경영학석사)과정 졸업예정인 L(30)씨는 지난 여름방학 때 '인재'로 선발돼 국내기업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했지만 끝내 취업 보장을 받지 못했다. L씨와 같은 미국 유명대학의 MBA출신은 몇 년 전만 해도 잘 나가는 '귀한 몸'이었다. 그러나 벤처 거품이 빠지면서 L씨가 다니는 학교의 한 학년에 20명 가량이 되는 한국 유학생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미국 취업시장은 얼어 붙었고, 아시아 시장은 중국 학생들이 장악해 결국 이들이 갈 곳은 한국뿐이지만 역시 '오라'는 기업이 없다.

1980년대 후반, 30만명의 대학 졸업자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고학력층에서 최악의 취업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석·박사를 비롯해 공인회계사 등 이른바 전문가 집단까지 이에 휘말려 있다. 대기업에서 박사 대리, 변호사 대리가 흔해졌고, 공인회계사는 합격자 중 절반 가량만 실무수습 기회가 주어진다. 한국학술진흥재단에 따르면 한해 평균 8,000명 이상의 박사가 배출되지만, 대학과 연구소가 수용할 수 있는 박사는 연 3,000여명 수준이다. 고학력자 홍수사태가 벌어지자 일찌감치 방향을 바꿔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학생이 늘어, 올해도 서울대 박사과정 전형에 절반 이상의 학과에서 미달사태가 빚어졌다.

'고학력자들이 눈높이를 낮추어 하향 지원하면 되지 않는냐'는 지적도 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취업이 안돼 석사공부한 것이 아니냐'는 기업 인사 담당자들의 말 속에서 석사 출신자들은 '도피성 학업자'로 전락해 있다. 이런 시각은 기업이 고학력자를 기피하는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학위에 걸맞은 대우 문제로 부담이 크고 이직률마저 높은데다, 학식이 직접적으로 업무 및 수익성과 연결되기 어렵다는 것 등이 기업들이 지적하는 고학력자에 대한 불만이다.

현대건설은 최근 각 대학에 보낸 사원채용 공문에서 추천학생 대상에 석사를 제외해 달라고 주문했고, 현대모비스는 지원자중 박사를, LG건설은 공인회계사를 모두 탈락시켰다. 최근 원서를 마감한 KOTRA에는 22명 모집에 대학원 졸업자 370명을 포함, 2,300여명이 응시했지만 KOTRA 측은 "학력은 중요하지 않다"며 학력우대는 없다고 말했다.

리쿠르트 이정주(46)사장은 "몇 년 전 환란 당시 취업을 미루며 유학 등 학업을 계속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고학력 취업병목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장은 "수요자(기업) 우위 시장인 노동시장에서 공급자인 대학이 기업의 니즈(needs)를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장성근 수석연구원은 "기업들이 주력사업을 찾지 못해 현금만 쌓아두고 투자를 미루면서 고학력자들이 갈 곳이 없게 됐다"며 "인력이 자산이 아닌 비용 개념으로 바뀌고, 비정규시장 내 인력공급이 포화상태인 것도 고학력 실업난을 부추기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 전문가 조언

해외 MBA나 공인회계사 자격증이 '취업 보증수표'이던 시대는 이젠 끝났다. 일부 기업에서는 고학력자가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아예 서류전형에서 탈락시키고 있을 정도다. 앞으로 고학력자들의 취업난은 더욱 악화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런 고학력자들이 취업난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LG전자,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주)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의 인사담당 임원 및 담당자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LG전자 인사팀장 한만진 상무는 "석·박사 등 고학력자들의 취업난이 심각한 것이 사실"이라고 전하며 고학력 취업난 극복의 첫번째 길은 자신의 전문성과 채용 방향이 맞아떨어지는 기업군(群)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단 그와 같은 목표 기업군이 정해지면 끈질기게 문을 두드려 공략하는 것이 실업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 상무는 말했다.

외국어는 물론 필수다.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화하면서 영어는 이젠 기본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중국어, 스페인어 등 제2외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데 인사담당자들의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삼성전자 채용·교육담당 우종삼 부장은 "이제는 웬만한 규모의 국내 기업들도 상당히 글로벌화했기 때문에 국내의 다국적 기업은 물론이고 토종 국내기업에 입사하기 위해서도 언어적인 장벽이 없어야 한다"며 "영어는 물론 제2외국어와 국제적인 에티켓을 갖추는 것이 이젠 필수"라고 강조했다.

취업문제 전문가들은 또한 고학력자들이 대기업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인쿠르트 이광석 사장은 "자신의 경험과 비전 등을 고려해 우수한 중소기업에도 눈을 돌리는 것이 좋다"며 "너무 연봉 등 급여수준에 연연해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또한 이력서를 어떻게 작성하느냐는 것도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취업 당락의 큰 변수다. 인사담당자들은 가정 먼저 접하는 이력서에 자신의 경력과 학력 등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도록 차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박희정기자 hjpark@hk.co.kr

■700명 뽑는데 석박사·MBA 3,700명 몰려 / 석사이상 우대기업 0.8%뿐

신입사원 700명을 선발중인 현대·기아자동차에는 2만5,752명이 지원해 36.8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박사학위 소지자는 104명이었고 석사학위 소지자와 해외 경영학 석사학위(MBA) 소지자는 각각 3,192명과 413명. 이른바 고학력 구직자가 3,709명이나 몰려들었지만 서류전형에서 3,182명이 무더기 탈락했다. 이들의 서류전형 통과 경쟁률은 무려 7대 1. 1998년 외환위기부터 시작된 취업난을 피해 대학원으로 '숨어 들었던' 석·박사 학력의 고급인력들이 최근 들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들을 위한 일자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취업포털업체 스카우트(www.scout.co.kr)가 자사 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한 구직자의 학력을 분석한 결과, 대졸 이상의 구직회원(11월13일 현재 누적치) 96만7,881명 중 석사학위 소지자는 5.0%인 4만8,721명이었다. 박사는 0.7%인 6,632명.

그러나 최근 3개월간 이력서를 등록한 대졸 이상 구직자(7만3,409명) 대비 석사와 박사의 비중은 각각 6.3%(4,650명)와 1.1%(826명)로 늘었다. 반면 3개월간 게시된 구인공고 2만582건 중 석사 이상 구직자를 우대한 공고는 162개로 0.8%에 불과했다.

산술적으로도 대졸 학력자 6만7,933명 앞에는 2만420개의 기업이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지만, 석사 이상인 5,476명에게는 162개 기업만이 문을 열어두고 있는 것.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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