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역(分岐驛). 철로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하지만 철로가 갈라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가는 이들의 잦은 발길은 역세권 개발에 지역 발전의 부수입을 한아름 안겨 준다.2004년 1차 개통되는 경부고속철과 신설 계획이 수립되고 있는 호남고속철도 자연히 분기역을 두게 돼있다. 현재 충남도와 충북도, 그리고 대전이 서로 자기 지역에 분기역을 두겠노라고 사활을 건 유치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일러야 10여년 후에나 들어설 호남고속철 분기역은 충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였던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를 갈라놓고 있었다.
■"납세거부 하고 충북선도 걷어 내겠다."
눈발이 흩날린 8일. 충북 청주 모 호텔에선 도내 기관장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분기역 유치를 위한 조찬 회의가 점심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이어졌다. "유치가 안되면 더 이상 충북 발전은 없다"는 결의를 토해낸 참석자들의 면면엔 비장감 마저 서렸다.
충북, 그리고 청주의 피해 의식은 상상 외로 컸다. "충북은 개털이야. 들어서는 건 술집밖에 없어." 청주 토박이 택시기사 한모(57)씨는 분기역 얘기를 꺼내자 절절히 소외감부터 쏟아냈다. "여기가 국토 한복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시청 인근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강모(51)씨는 한 노(老) 정치인을 씹어 댔다. "순 사기꾼이여. 선거 때만 텃밭이네 하고선 이런 건(고속철 분기역) 자기 동네로 돌리잖아." 그는 "충북 사람 대부분이 1997년 호남고속철 기본계획 발표 때 천안이 유력한 분기역 후보로 떠오른 것은 당시 민주당-자민련 연합 정권의 타협산물로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호남고속철이 천안에서 분기하면 선로는 공주 등 충남을 거쳐 목포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청주(정확히 말해 청원군 오송리)에서 갈라지면 선로는 공주를 지날 수 없다. "천안이 문제가 아녀. 그 양반 정치적 기반인 공주에서 난리를 치니까 천안에서 분기하도록 한거야." 청원군 오송리 인근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강모(45)씨의 주장이다.
청주 사람들은 5년 여를 끌어온 분기역의 유치 논쟁 과정과 쟁점을 꽤나 상세히 알고 있었다. "국토가 균형적으로 발전하려면 (강원지역을 잇는)충북선 철도가 지나는 청주에 분기역이 들어서야 해. 그래야 철도망이 X자를 이뤄 제대로 국토가 개발되지. 이용객도 청주 분기가 하루 9,000명이나 많아."
나름대로의 당위성으로 무장한 충북 사람들은 '천안 분기가 낫다'는 7월 건설교통부의 분기역 선정 관련 용역결과 중간발표를 짜맞춘 각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난데없이 복복선 건설을 들고나와 청주 분기가 비용이 더 들어간다고 억지를 부리고, 백제 고도 공주를 지나는 천안 분기가 청주(오송) 분기보다 문화재가 덜 훼손된다는 황당한 결과를 어떻게 낼 수 있는지…."
시민들은 "유치가 안될 경우 납세를 거부하고 충북선을 걷어내겠다"는 격한 말도 쏟아냈다. "그 동안의 소외도 억울한데 정치권 장난으로 정당한 주장이 뭉개지면 도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난리가 난다구. 양반들이 성나면 더 무서워."
■거대한 결의장을 방불케 하는 공주시
오락가락하는 먹구름이 70㎞ 지척 청주에 눈을 뿌렸지만 천안시를 경유해 도착한 공주의 하늘은 맑았다. 날씨만큼이나 두 지역 민심도 천양지차였다. 금강이 가로지르는 백제의 고도 공주는 '호남철·도청 유치'를 주장하는 플래카드로 덮여있었다. 이 플래카드는 시민들이 자비를 털어 스스로 집 앞에, 영업장 앞에 내건 것이라고 했다.
시민들은 젖먹이와 호호백발 노인을 제외한 시민들의 70%가 호남철 유치를 위해 서명했다고 한다. 정작 천안 시민들은 분기역 유치에 별 관심을 안 보이는데 비해 '철로 하나 깔리지 않은' 공주 시민들은 필사적이었다.
"개발 소외감이라면 청주 못지 않다"는 공주 시민들은 청주와 반대로 건교부의 중간 용역 결과를 대의명분으로 내걸고 있었다. "연구 결과, 천안 분기가 타당하다고 나왔는데 그걸 못 믿겠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국토의 균형 발전이라면 철로 없는 공주에 철로를 놔야죠." 자신의 식당 앞에 플래카드까지 내건 성모(41)씨의 주장이다.
시청 앞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김모(49)씨는 충북 사람들은 정치권이 충남을 밀어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하자 버럭 화부터 냈다. "그 사람이 충남을 위해 한 게 뭐가 있어. 아직 천안 분기가 확정 안된 건 그 사람이 고향 사람 버리고 충북 눈치를 본것 때문이야."
공주 시민들은 고속철 천안분기 타당성의 근거로 주이용객이 될 서울, 호남 지역민들의 편의성을 들었다. 천안역에서 분기를 하게 되면 청주(오송)분기 경우보다 전체 운행 시간이 4분 단축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연구 결과가 말해 주잖아요. 그런데 지역 이기주의 때문에 충북 사람들이 국가백년사업을 뒤엎으려고 해서는 안되죠" 공주시 금성동에서 만난 회사원 이모(39)씨는 "97년 호남철 기본계획이 나왔을 때만 해도 당연히 천안에서 호남철이 분기해 공주로 지나겠거니 했는데 뒤늦게 충북쪽에서 딴지를 걸고, 정치권이 눈치를 보면서 일이 꼬였다"며 충북쪽으로 한껏 눈을 흘겼다.
공주와 청주는 어찌보면 닮았다. 개발 소외로 '교육도시'외에는 내세울게 없다고 자조하는 것이, 소외의 시원을 철로가 비껴간 데서 찾는 것이 그렇다. "옛날에 뭘 모르고 양반 동네에 어떻게 철마가 다니냐며 철로를 반대 했었잖아. 대전은 철로가 지나서 얼마나 발전했어."공주, 청주 시민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100년 전 철로가 들어오는 것을 기를 쓰고 반대했던 이들 지역은 지금 고속철로 유치를 위해 기를 쓰고 있다.
/청주·공주·천안=이동훈기자 dhlee@hk.co.kr
■청주, 승객수요 많고 천안, 운행시간 짧아 / 최근 대전도 가세… 내년 6월 선정
호남고속철도 분기역 논쟁은 정부가 본격적으로 호남고속철 기본 계획을 구상한 1997년께 시작됐다.
당시 철도청이 내놓은 기본계획안과 건교부가 내놓은 국가기간교통망 계획안은 호남고속철이 세워질 경우의 분기역을 천안으로 표기해놓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치 희망 의사를 피력해온 충북의 반발이 본격화했다.
IMF사태로 호남고속철 건설 계획 자체가 유보되면서 잠잠하던 분기역 논쟁은 건교부가 지난해 5월 호남고속철 기본계획 재수립 용역에 착수하면서 재점화했다.
특히 올 5월과 7월 중간연구결과가 알려지면서 충북(청주)과 충남(천안)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았다. 올 초 대전도 분기역 유치에 본격 나서며 3파전 양상을 띠고 있다.
건교부는 "현재 용역 조사 중이며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유치 희망 지역들은 건교부의 중간연구결과를 반박하거나 토대로 삼으면서 각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쟁점은 사업비 등 경제성 환경성 문화재 분포 승객 편의성 승객 수요 지역 발전 등이 망라돼 있고 장·단점이 첨예하게 엇갈린다. 사업비만해도 서울-분기역간 선로를 복복선으로 하느냐, 기존 경부선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주장이 분분하다. 복복선을 깔 경우 천안분기가 사업비가 적게 들지만 기존 경부선을 공유할 경우엔 청주분기의 사업비가 더 적다. 승객 수요면에선 청주 분기가 낫지만 운행시간에선 천안분기가 장점이 있다. 충북에선 충북선과 연계한 국토발전을 내세우고 충남에선 승객 편의성을 앞세운다.
건교부는 내년 6월 최종 용역조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지만 유치 희망 지역들은 "차기정권에 떠넘기지 말고 연말 안에 결과를 발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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