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은행잎이 길바닥에 구르고, 국회의사당 주변은 온통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들었지만 이 곳 사람들은 가을 정취에 빠져들 틈이 없다. 눈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 때문이다. 특히 내가 몸 담고 있는 민주당은 친(親) 노무현 대 반(反) 노무현 세력의 반목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요 며칠 사이는 소속 의원들의 잇따른 탈당으로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나는 이번 대선을 초연하게 지켜보고 있다. 당에서 내게 특별한 역할을 맡기지도 않았고, 나 자신도 이제는 관전자로 있는 데 만족하고 있다. 다만 이번 대선이 공정하게 치러져야 하고, 누가 대통령이 되든 국민 통합과 국가 발전에 열과 성을 다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 나는 조만간 출간할 회고록을 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일 아침 9시면 어김없이 국회 의원회관 323호로 출근해 관련 자료를 뒤적거리면서 글을 다듬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국회 상임위나 본회의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의원으로서 최소한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2002년 정기국회를 사실상 마무리하는 본회의가 열린 7일과 8일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틀 동안 무려 150건에 가까운 법안을 통과시킨 발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많은 법안을 처리하는 동안 의결정족수를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의장으로 있는 동안 내가 하루에 30건 이상의 의사일정을 잡지 않은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의원들이 이 핑계 저 핑계로 하나 둘씩 자리를 뜨는 바람에 본회의장에 빈 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눈에 의결정족수에 한참 모자랐는데도 법안은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나는 속으로 "위법 논란이 일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다.
11일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은 의결정족수 미달 상태에서 통과된 법안을 재의결하겠다고 밝혔다. 국회 사상 초유의 일이다. 국민에게 낯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짓이다. 박 의장은 재의결 방침을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모든 법안을 전자투표로 처리하겠다. 이는 '날치기를 없애겠다'는 역대 국회의장들의 의지와도 맞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의장으로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날치기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킨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자랑 같아서 쑥스럽긴 하지만 16대 전반기 국회는 날치기가 없었다는 점 외에도 과거의 국회와는 많이 달랐던 게 사실이다.
나는 의장에 취임하자마자 마음으로는 이미 당적을 떠났다. '불편부당하게 국회를 운영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또 국회의 권위와 내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든 국회의장을 그만 둔다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제227회 임시국회 마지막날인 올 2월28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장의 당적 이탈을 명문화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됐을 때는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제헌 국회 이래의 숙원이자 나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개정된 국회법 발효와 함께 그동안 소속했던 민주당을 떠나 당적을 갖지 않은 최초의 국회의장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그밖에도 16대 국회는 오랫동안 여야 의원들이 희망했고, 국민도 바란 자유투표제를 명문화했다. 비록 선언적 규정이긴 하지만 의원은 독립적 헌법기관으로서 소속 정당의 의사에 묶이지 않고 양심에 따라 투표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이제 아쉽지만 이번을 마지막으로 석달 반 이상 연재된 나의 이력서를 마무리한다. 미처 다하지 못한 얘기는 곧 출간할 회고록에서 다시 상세하게 밝힐 예정이다. 그 동안 매일 아침 나의 정치 인생을 따뜻한 눈길로 되돌아 봐 준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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