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향으로 간다. 4·3의 집단학살을 겪은 '순이 삼촌'이 살던 곳, 새가 우짖는 변방, 바람 타는 섬. 그의 몸 속에 오래오래 깨어 있는 죽음을 달래고 길들이기 위해서 고향의 바다를 찾아간다. 검은 현무암의 바닷가에 앉아서 혼자 소주를 마신다.소설가 현기영(61)씨가 산문집 '바다와 술잔'(화남출판사 발행)을 출간했다. 2년 가까이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 분주한 시간을 꾸려온 그의 산문 41편은 단단하고 힘있게 울린다. 현기영씨는 한국문학사에서 4·3 문제를 처음으로 다루어 충격을 주었던 '순이 삼촌' 이후 '변방에 우짖는 새' '마지막 테우리' '바람 타는 섬' 등 제주도의 역사적인 고난을 작품으로 옮겨온 작가다. 현씨의 산문 역시 자신을 키운 제주도의 바다와, 술잔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고교 때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품었던 소녀는 폐결핵 말기였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집안마저 거덜나자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수평선을 향해 헤엄쳐 가다가 죽을 참이었다. 이상한 감각이 생겼다. 겨울 바다의 차가운 물이 정신을 바짝 나게 했고, 헤엄치는 동안 팔다리에 힘이 붙으면서 강한 생명력이 되살아났다. 다시 죽기로 했다. 겨울산에 들어가 얼어 죽으려고 하던 그는 산 속에서 수많은 원혼들을 만났다. 4·3사태 때 산까지 쫓긴 피난민들이 보았을 세계의 끝.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자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소설로 지으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인데 산문으로 쓰게 됐다"면서 현씨는 웃는다.
그의 산문은 어느 것 하나 고향에 대한 자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자의식이 현씨의 글을 견고하게 만든다.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게 하는 것, 그러니까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모순적 상황이 첨예한 양상으로 축약되어 있는 곳이므로, 고향 얘기를 함으로써 한반도의 보편적 상황의 진실에 접근해 보는 것"을 문학적 전략으로 삼는다. 변방의 자리에서 언어의 정신을 지켜온 그가 보기에 21세기 문학은 어떤 인간을 옹호해야 할까. "문학은 이성의 복원력을 잃지 않는 인간, 공동체의 꿈을 지키고 실현하려는 인간을 지켜야 한다"고 현씨는 단호하게 말한다. 소비, 향락의 천박한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문학이 이 현실을 외면하면 안된다고, 영합이 아닌 세련된 비판으로써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문집 2부에는 엽편소설 5편도 함께 실렸다. 교사 시절의 체험, 술에 얽힌 추억 등 작가의 인생의 단면을 잘라내서 형상화한 짧은 소설들이다. 그는 내년 봄부터 문예지에 새 장편소설을 연재할 계획이다. "지금껏 과거의 역사를 소설화함으로써 현대를 반추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당대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말한다. 9·11 테러와 같은 세계적인 사태, 문란한 성 풍속이 횡행하는 현대 사회의 혼란스런 상황이 '묵시록'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종말의 위험이 드리워진 오늘날을 소설로 쓰는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됐다. 이 소설을 마친 뒤 현씨는 제주도로 떠나 고향에서 삶을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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