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기적의 역전드라마를 연출하며 첫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다음날인 11일 새벽 김응용(61) 감독은 대구 외곽에 자리잡은 앞산공원의 등산로를 걷고 있었다. 전날 밤의 감격을 차분히 정리하기 위해 산행을 생각했는지 당초 야구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그는 약속시간이 임박해서 갑자기 마음을 바꿔 앞산공원으로 오라고 했다.평소 덕아웃으로 찾아가 질문을 던져도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던 터라 조심스럽게 산행을 따라 나섰다. 하지만 우승의 기쁨이 그만큼 컸던지 등산복 차림을 한 김 감독도 이날 만큼은 웃는 얼굴로 반겼다. 김 감독을 알아본 대구 시민들이 지나가며 "삼성에 우승컵을 안겨줘 고맙다"며 덕담을 건네자 쑥스러운 듯 '허허' 웃으며 "고맙습니다"라고 화답했다.
1982년 해태(기아 전신) 지휘봉을 잡은 이래 팀을 9차례나 정상에 올려 놓는 등 국내 프로야구가 출범한지 21년 동안 남들은 한번도 하기 어려운 한국시리즈 우승을 무려 10차례나 이룬 우리 시대 최고의 명장. 그것도 20년간 7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번번이 주저앉는 우승징크스에 시달리던 삼성에 감격의 첫 우승을 안긴 승부사의 속내는 어떤 것일까.
■우승 징크스
먼저 삼성의 한국시리즈 징크스에 대해 묻자 김 감독은 "처음에는 나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생각했지. 솔직히 삼성은 객관적인 전력상 최강의 팀이 아닌가. 하지만 이길 경기를 자꾸 놓치게 되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어"라고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털어놓았다.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한국시리즈가 시작된 뒤 우승의 '우'자만 나와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덧붙였다.
김 감독은 또 "처음 삼성에 와보니 10여명의 선수들이 모두 미국에 가서 재활치료를 받겠다고 하더라.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들 싱싱하기만 해. 아무리 개인기량이 뛰어나면 뭐해. 이길 생각이 있어야지"라고 말했다. 부자구단 삼성 선수들의 근성부족이 그 동안 스스로를 사로잡았던 우승 징크스의 가장 큰 원인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김 감독도 우승 징크스의 쓴 맛을 봤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서 두산에 충격의 패배를 당하고 도망가다시피 잠실구장을 빠져나간 뒤 야구계에서는 "삼성의 징크스가 김응용마저 집어삼켰다"며 수군댔다. 김 감독은 그래서인지 "그 동안 9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봤지만 이번 만큼 힘들게 싸운 적이 없다. 마치 처음 우승한 기분"이라며 감격스러워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김 감독은 징크스를 많이 따지는 편이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는 결코 손톱을 깎지 않고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는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도 손톱이 손바닥을 찔러 손을 움켜쥐지 못했는데도 깎지 않았다. 어쩌면 기적이 연출된 한국시리즈 6차전도 행운의 힘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날 야구장에 들어가기 전에 지나가는 영구차를 보고 우승을 예감했다고 했다.
■용병술
10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비결에 대해 김 감독은 "운이 좋았다. 남들은 나보고 '사람 복이 많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감독생활하면서 참 좋은 선수들을 많이 만났다"라고 말한다.
김 감독의 선수 길들이기는 유명하다. 지난해 자타가 공인하는 홈런타자 이승엽이 부진하자 6번으로 내려 앉히며 "홈런의 영양가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또 몸 관리나 연습을 게을리하는 선수들에게는 "너는 프로가 아니야"라고 혹독하게 꾸짖곤 한다. 때문에 웬만한 고참선수들도 말을 함부로 붙이지 못할 만큼 어렵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김 감독이 선수들을 내몰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한국시리즈 내내 극심한 타격부진에 시달렸던 이승엽이 6차전서 홈런을 칠 수 있었던 원동력도 김 감독의 용병술 덕분이다. 김 감독은 "언젠가 한방 쳐줄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프로야구 감독관에 대해 묻자 돌아온 답은 의외로 짧았다. "감독이 선수들 '해코지'만 안 하면 되지. 사실 실력 있는 선수들은 게으름만 피우지 않으면 다 잘하게 돼있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또 선발 임창용을 중간계투로 투입하는 등 변칙적인 용병술에 대해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한 것 아니냐"고 묻자 "승부의 세계는 전쟁이다. 영광은 오로지 승자의 권리"라고 받아 넘겼다.
21년간 13명의 감독이 거쳐갔을 만큼 전통적으로 프런트의 입김이 센 삼성구단을 휘어잡은 것도 이처럼 타고난 용병술덕분에 가능했다. 김 감독은 "만약 우승만을 위해 삼성에서 오라고 했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스타일의 야구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해서 삼성으로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원한 승부사
우승직후 감독실에서 잠시 커피를 마시며 내년 시즌 구상을 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보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승을 하고 싶냐"고 묻자 김 감독은 오히려 "감독이라면 누구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순간까지 정상에 서고 싶은 것"이라고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내년 시즌 삼성의 선발 마운드를 더욱 보강, 한국시리즈 2연패에 도전하겠다는 김 감독은 "삼성이 이제 한번 길을 텄으니 두번째 우승은 더 쉬울 것"이라고 자신했다.
산행을 마친 뒤 김 감독은 자신의 SM5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우승했다고 날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으니 잠시 몸을 피해야 나도 살지"라며 손수 운전을 하고 떠났다.
/대구=박천호기자 toto@hk.co.kr
■ 인간 김응용
코끼리처럼 큰 체구에 성격까지 무뚝뚝한 김응용(61) 삼성감독은 기자들이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지도자다. 기자들과 담소를 즐기는 김성근 LG감독이나 친화력이 장점인 김인식 두산감독과는 달리 쉽게 말문을 열지 않는다. 경기 전에도 기자들을 만나기보다 감독실에서 홀로 월간지 등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하지만 무뚝뚝한 인상이 김 감독의 전부는 아니다. 이번 한국시리즈 1차전 승리 후 이례적으로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격려한 이유를 묻자 "왜 나는 박수치면 안되나요"라고 대답,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를 아는 지인들은 한결같이 겉 모습과 달리 정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해태 시절부터 오랫동안 김 감독과 동고동락한 유남호(51) 삼성 수석코치는 "감독님은 여리고 속이 깊은 분"이라며 "성실한 선수를 보고도 무관심한 척 하다가 출전기회로 신뢰를 표시하시는 스타일"이라고 들려준다.
한국전쟁중인 1·4후퇴 때 아버지, 누나와 월남한 김 감독은 TV에 이산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순식간에 눈물을 쏟는다. "10번이나 우승하면서 울어본 일은 없지만 이산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감출 수 없다"고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다. 성사는 되지 못했지만 2000년 첫 이산가족 상봉 때는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상봉신청도 했다.
아마시절엔 부동의 국가대표 4번타자와 국가대표 감독을 지냈고 프로에 와서는 남들이 넘보기 힘들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어린시절에는 고생도 많이 했다. 60년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당시 최강 팀인 농업은행에 입단하려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간신히 한국운수 연습생으로 야구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피나는 연습 끝에 63년 국가대표 4번타자로 발탁되며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서울대 미대 출신의 동갑내기 부인과 딸만 둘을 두고 있다. 미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장녀는 어머니와 서울에 살고 있고 음악을 공부하는 차녀는 미국 유학 중이어서 시즌 내내 대구에서 생활하는 김 감독은 이산가족인 셈이다.
시즌 중 대구구장 근처의 아파트에 머무는 김 감독은 앞산공원을 걸으며 스트레스를 푼다. 틈만 나면 지리산을 찾을 정도로 등산이 취미. 통일이 된다면 북한에 야구를 전파하는 게 김 감독의 마지막 소망이다.
/대구=이왕구기자 fab4@hk.co.kr
● 프로필
김응용(金應龍)
생년월일 1941년 9월 15일 평안남도 숙천생
가족관계 부인 최은원(61)씨와 2녀
출신학교 부산개성중―부산상고―우석대
신체조건 키 185㎝·몸무게 95㎏
주요 경력
1960 한국운수(대한통운) 연습생으로 입단
63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64 한일은행 이적
65, 67 실업야구홈런왕
71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
73∼81 한일은행 감독
77∼80 국가대표감독
83∼2000 해태감독
2000 시드니올림픽 대표팀 감독
2001∼ 삼성감독
프로야구 최우수감독상 1983,86,87,88,89,91,93,96,97,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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