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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국토기행] (5) 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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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국토기행] (5) 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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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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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기도 진짜 많이 외웠다. 대한민국의 극동은 경북 울릉군 독도, 극서는 평북 용천군 마안도, 극남은 제주 남제주군 마라도, 극북은 함북 온성군 유포진…. 그러면 정중앙은? 외운 기억이 없다. 국립지리원과 김창환 교수가 이끄는 강원대 지리교육학과 조사단이 대한민국 정중앙점을 찾아낸 것이 불과 올해 4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동경 128도2분2.5초, 북위 38도3분37.5초에 자리잡은 강원 양구군 남면 도촌리이다. 서울에서 44번, 46번 국도를 차례로 타고 4시간 여 만에 도착한 양구. 우선 도촌리부터 찾았다. 정중앙점 표지석이 박힌 곳은 도촌리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인근 봉화산 중턱. 뭔가 신령스러운 기운이 샘 솟기를 바랐던 기대와는 달리 그곳은 군부대 사격장 한 복판이었다.

심장에서 붉은 피를 쏟는 것 같은 정중앙점 인상이 너무 강했기 때문일까. 이후 둘러본 양구 곳곳에서는 산골마을의 상쾌한 공기보다 분단과 냉전시대의 아픔이 먼저 느껴진다. 하긴 이런 곳이 어디 양구뿐이랴.

양구읍에서 30여㎞ 더 북쪽에 위치한 민통선 마을 해안면. 을씨년스러운 이곳 풍경만으로는 남북 화해협력시대는 여전히 남의 일이다. 해가 떨어지자 식당에는 자장면을 먹는 군인 몇 명만 보일 뿐이다. 1990년 발견된 제4땅굴을 관광 상품화한 견학관에서는 '북한의 기습침략에 대비하자'는 내용의 안보영화가 상영 중이다. 남방한계선에 세워진 을지전망대에서는 '미군철거' '무적강군'이라는 북한군 팻말이 또렷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군청 홍보계장 한수철(49)씨에게 물어봤다. 두 살 때인 1954년 아버지를 따라 춘천에서 양구로 이사를 온 토박이 공무원이다. "해안면에는 토박이가 없고, 그래서 과거가 없다는데요?" 원래 북한 땅이었다가 한국전쟁 후 남한 땅이 됐고, 1956년이 돼서야 주민들이 살기 시작한 해안면의 역사를 물은 것이었다. 돌아온 그의 대답. "살면 토박이이고 하루 지나면 과거지요." 그러면서도 "불과 1970년대 초만 해도 3일 동안 신원조회를 거친 후에야 들어올 수 있는 대한민국의 티베트였다"고 덧붙였다.

양구읍 월명리와 상무룡리에 걸쳐 있는 파로호에서는 현재 진행형인 냉전시대의 생채기가 느껴진다. 파로호는 원래 깊은 수심에서 사는 붕어의 강한 당길 맛으로 낚시꾼들의 고향처럼 여겨져 온 곳. 그러나 지난해 10월 북한 금강산댐 붕괴를 우려해 하류에 있는 화천댐 수문을 연 탓에 지금은 완전히 흉물이 됐다. 수위는 원래보다 30여m 내려갔고, 낚시배는 사공이 많았던 것도 아닌데 산 중턱에 놓여져 있다. 그물과 주낙으로 붕어와 잉어, 빙어 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던 어민들은 살 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파로호에서 월명리 낚시터를 운영하는 김상덕(44)씨의 하소연이다. "'파로호 비우기'가 남북 분단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 어민들은 어떻게 합니까? 상류에 있는 평화의 댐 보강공사가 끝나면 다시 물을 채운다고 하지만, 파로호 생태계가 다시 복원되려면 아마 10∼15년은 걸릴 겁니다. 올해 초 물 빠진 바닥에 하얗게 깔린 조개 껍데기는 이곳 주민들의 암울한 미래, 그 자체입니다."

냉전시대가 가고 남북 화해협력시대가 와도 양구는 걱정이 태산이다. 냉전시대에는 그나마 안보관광 수입과, 주민 수(2만4,000여 명)에 버금가는 인근부대 군인들의 지출로 살아왔지만 남북간 화해분위기는 오히려 양구 주민들을 걱정스럽게 한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금강산 육로관광(강원 고성군), 경의선 철도복구공사(경기 파주군) 모두 양구를 비켜가기 때문이다.

제4땅굴과 을지전망대 관광객 출입을 통제하는 해안면 북한관의 김종희 관장은 "이곳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등 햇볕정책이 절정에 올랐던 2000년에 오히려 관광객이 급감했던 지역"이라며 "올해 겨우 관광객이 다시 늘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북한 가는 철로·육로가 다른 곳에 뚫리면 이곳 양구는 다시 한번 소외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어느 지역이나 희망은 꿈틀거리는 법. 이런 양구에 "뼈를 묻겠다"고 한 사람도 있다. 경기 수원에서 농협연수원 교수로 일하다 1999년 양구군 해안면으로 이사를 온 정낙훈(57·사진)씨. 해안면 일대 밭 20만 평에서 메주콩 서리태 콩나물콩 등 여러 국산 콩을 경작하는 그는 양구에서 자신과 우리 콩의 미래를 발견했다. "양구는 끊임없이 바람 방향이 바뀌어 농약을 안 써도 병충해 걱정이 없는 국내 유일의 경작지입니다. 내년부터 콩깍지를 먹여 키우는 흑염소를 곳곳에 방목하면 양구는 국내 최고의 관광명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0월25일 양구읍 정림리에 개관한 박수근 미술관도 양구의 또 다른 미래를 상징한다. 고인(1914∼1965)의 생가터에 자리잡은 이 미술관에 개관 10여 일만에 2,000여 명이 다녀갔다. 원화 한 점 없는 상태를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미술관 큐레이터 권성아(30)씨는 "미술관 개관은 척박한 군사도시 양구의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줄 획기적 사건"이라며 "주변 관광지와 연계한 관람 프로그램을 마련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국토 정중앙점 개발사업은 양구가 계획 중인 청정관광단지 개발사업의 핵심. 군부대 사격장 이전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많지만 9월 이미 1909년 '일본의 배꼽(정중앙)'으로 선정된 효고(兵庫)현을 방문, 사업모델로 삼았을 정도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임경순 군수는 "국토 정중앙 도촌리는 청정지역 양구의 이미지에 걸맞은, 뒤늦게 발견된 귀중한 관광자원"이라며 "학술대회를 열고 주민과 군부대 의사 등을 수렴해 종합적인 국토 정중앙 관광개발사업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한 기반사업이 춘천―양구간 44번 국도 확장공사와 현재 왕복 2차로인 인제군 신남면―양구간 46번 국도 확장공사. 이를 통해 양구의 접근성이 높아지면 DMZ 생태탐사 프로젝트, 생태식물원, 향토사료관, 선사박물관, 야생동물박제박물관 등 양구가 계획 중이거나 완료한 청정지역 관광산업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남한에서 내금강까지 가는 최단거리 도로(52㎞)인 31번 국도도 양구가 향후 제2의 금강산 육로관광의 중심지로 부각될 것에 대비해 확장할 계획이다.

양구읍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민영호(52)씨는 "군인과 주민이 싸운 다음 날 부대에서 외출금지령이라도 떨어지면 양구 경제는 그야말로 꽁꽁 얼어붙는다"며 "이런 양구가 앞으로 살 길은 천혜의 청정자원을 개발, 다른 지역에서는 느낄 수 없는 관광상품을 내놓는 것뿐이라는 공감대가 주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양구에 전해 내려오는 우스개 소리가 맞았다. '양구에서 굴뚝연기가 나오는 곳은 목욕탕뿐이다'. 변방도시 군사도시 안보관광도시 양구는 자신의 미래가 굴뚝 없는 산업, 관광산업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구=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 민통선마을 해안면 전기수씨

양구군 해안면은 '펀치 볼'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 지형을 본 외국 종군기자들이 '펀치(Punch) 주스를 담는 그릇(Bowl)'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인근 대암산 정상에서 산악 분지인 해안면을 보면 진짜 움푹한 그릇처럼 생겼다. 지금도 면내 주유소 이름은 '펀치 볼 주유소'이다.

그러나 1956년부터 이곳에 살아온 주민 전기수(69·평화슈퍼 운영)씨는 이 마을을 '버드나무가 꽉 찼던 들판'으로 기억한다. 양구(楊口)가 버드나무 양(楊)자를 쓰는 연유다. "해안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56년부터입니다. 전쟁 전에는 사람 한 명 살지 않던 북한 땅이었죠. 난민정책의 하나로 고향인 인제군을 떠나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이주해오니 보이는 것은 온통 무성한 버들 밭뿐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해안면으로 강제 편입된 1세대 이주민 160세대 중 이곳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10여 세대 중 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진짜 사람 사는 게 아니었어요. 6사단에서 집을 지어줬는데 18평 주택에서 2가구가 살아야 했으니까요. 해가 지면 모든 집은 불을 꺼야 했어요. 불빛이 새 나가면 수색중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죠. 술도 외부에서 일체 들여올 수 없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민통선 안에 있는 유일한 마을이다 보니 이 같은 통제는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됐다. 제사도 초저녁에 지내야 했다. 외부에서 이 마을을 들어오려면 본적지에서 신원증명서, 보안부대에서 신원확인서를 받아야 했다. 보통 3, 4일이 걸렸다. "어렵사리 마을에 들어와도 1주일이 지나면 반드시 나가야 했지. 안 그러면 군인들이 들어와 내쫓았으니까요."

그는 요즘 금강산 육로관광길이 열린다는 소식에 심드렁하다. "지난해 금강산에 가봤는데 볼 것 없다. 을지전망대에 가서 망원경으로 보는 게 더 잘 보인다"고까지 지청구를 놓는다. 남북간 화해협력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면 해안면을 찾는 관광객이 줄어들 걱정 때문이다.

"지금 530세대에 달하는 주민 대다수가 근 50년 동안 남의 땅만 부쳐먹으며 살아왔어요. 민통선 지역이라 모든 땅이 국가 소유거든요. 그나마 군인들과 관광객이 흘린 돈으로 겨우 살아왔는데 이제 그것도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무슨 수가 있으려니 하고 살고 있는 거죠."

/김관명기자

■양구현황

인구 - 2만3,812명(전국 군단위 중 경북 울릉군의 1만246명 다음으로 인구가 적음)

면적 - 633.15㎢

행정구역 - 양구읍 남면동면 방산면 해안면 등 1읍 4면

관광지 - 제4땅굴 을지전망대 박수근미술관 선사박물관파로호 북한관 직연폭포 등

특산물 - 가시오이 뽕잎차 송이버섯 등

문화재 - 대암산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246호) 심곡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지방유형문화재 125호) 등

2002년 예산 - 1,113억1,38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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