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69)씨가 "요즘 시인들 중에 술꾼이 없다"고 개탄해 최근 화제가 됐다. 술의 고전적 의미가 모독당하는 오늘날, 시적 절실성도 그만큼 감소된다는 것이다. 지금껏 문학이 술에 절어 자라왔다는 일면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알코올과 예술가'(마음산책 발행)는 "예술은 얼마나 술에 빚지고 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탐구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27)가 2001년 펴낸 소논문이다. 논문이라지만 문체가 딱딱하거나 내용이 지루하지 않다. 술과 문학의 고리를 학술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가 흥미롭고, 작가들의 풍부한 사례가 재미있다. 가령 '길 위에서'의 작가 잭 케루악의 글쓰기 방식이 그렇다. 그는 써놓은 원고를 끌어안고 끙끙 앓으면서 고치는 게 아니라 아예 몇 번씩 새로 썼다. 글쓰기는 즉흥적이었으며, 그 방식은 케루악이 사랑한 재즈와 비슷한 것이었다. 재즈 연주자들은 즉흥 연주를 하기 전에 술로 흥을 돋우곤 한다. 케루악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술에 취해 극도의 흥분 상태로 책상에 앉을 것을 권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서른 다섯 살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흔 둘, 셋일 때는 정말 심했다. 쉰 살에는 간 경화로 죽을 뻔했다. 소설 '죽음의 병(病)'을 쓸 때는 하루에 포도주를 6㏄씩 마셨다. 술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엄청나게 살이 쪘다.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추락을 즐겼다. "나 자신이 완전히 해체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지요. 그럼으로써 일종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뒤라스는 훗날 술을 끊었지만, 그것은 작품에 전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사의 지시 때문이었다.
물론 술이 문학의 필요조건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미국 작가 제임스 엘로이는 금주뿐만 아니라 신문도 TV도 보지 않는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면서 작품을 썼다. 그러나 음주가 많은 작가들에게 문학의 모티프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 한 극단은 금기를 넘어서는 섹스일 것이다. 폴 바울즈의 소설 '사하라 사막에서의 차 한 잔'에서 남자는 친구의 아내에게 샴페인 여섯 병을 꺼내놓는다. 정사를 앞두고 여자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게 하기 위해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금기의 위반을 극한으로 끌고 간 작가일 것이다. 소설 '내 어머니'에서 비에 흠뻑 젖은 어머니가 아들의 방으로 들어간다. 어머니는 아들을 껴안는다. 이상한 전율이 흐른다. "술을 많이 마셨어. 난 나의 추잡함이 좋아."
모든 문학은 기성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그러니 술에 취한 작가로부터 시와 소설이 잉태되는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보들레르가 남긴 말. "끊임없이 취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에 취한단 말인가? 술이건 시건 덕성이건 그대 좋을 대로 취할 일이다." 많은 문인들에게 술은 육신을 갉아먹는 독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해로운 마실 것은 그러나 그들에게 누구보다도 깊은 우정을 나눠온 친구다. 보들레르가 '술이건 시건' 취하라고 할 때, 그것은 술과 시가 동의어라는 것을 알려준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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