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에는 승자의 이해관계가 반영되기 일쑤입니다. 승자는 자신의 행적을 철저히 미화하지만 반대 세력이나 반대 인물은 악의적으로 표현합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승자의 기록 뿐 아니라 패자의 증언도 함께 파악해야 합니다." 역사연구자이자 대중역사서 저술가인 이희근(李熙根·42)씨가 '전환기를 이끈 17인의 명암'(휴머니스트 발행)을 내놓았다. 통설을 뒤집으면서 연개소문 견훤 궁예 묘청 김부식 신돈 이성계 원균 이순신 광해군 인조 명성황후 등 우리 역사 속 인물 열일곱명의 삶을 재조명했다.
책은 연개소문에 대한 재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연개소문이 폭군으로, 고구려 멸망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라면서 고구려와 당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먼저 주문한다.
"당을 포함한 중국은 언제나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괘씸하게도 고구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력은 사해에 떨쳤다'는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고구려의 천하관이 드러납니다. 자기만이 천하의 중심이라 여긴 당이 이를 용납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당은 그래서 체제를 정비하고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는 한편 주변 국가를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상황이 이런데도 영류왕이 태자를 사신으로 보내는 등 당에 굴욕적인 외교로 일관하자 자연스럽게 반대세력이 형성됐고 연개소문은 그 중심에 있었다.
위협을 느낀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좌천시키는 등 무력화를 꾀한다. 이에 연개소문이 반발, 정변을 일으키고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당은 정변을 빌미로 644년 침공을 감행하지만 고구려군의 저항에 부딪쳐 실패로 끝난다.
당태종은 몇 차례 더 쳐들어왔으나 모두 실패하고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긴채 숨을 거둔다. 저자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존재하는 고구려는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는 막강한 나라였다. 그렇다고 저자가 연개소문을 무작정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 정치 엘리트를 반감시켰고 어쨌든 그가 죽자 고구려가 멸망한 것을 보면 문제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계 최강국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고구려의 독자적 세계관을 수호한 지도자라는 점이 간과돼서는 안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의자왕은 백제 왕조의 권위를 되살린 인물로 평가한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한강 하류 위례성을 뺏기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다. 왕실의 근거지가 바뀌면서 천도 이후 임금 10명 가운데 문주왕 동성왕 법왕 등 최소 3명이 웅진의 귀족세력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왕조의 힘은 미약했다. 땅에 떨어진 권위는 그러나 의자왕이 한강 하류를 회복함으로써 어느 정도 복원됐다. 3,000 궁녀가 상징하는 방탕한 생활과 관련, 저자는 "왕조시대에 여자를 밝히고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모든 임금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며 "그런데도 의자왕만 유독 방탕했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구려 백제를 정복한 김춘추 김유신은 어떻게 바라볼까. 신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일 뿐 삼국통일의 영웅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당시 신라는 백제에 영토를 빼앗기는 등 위기에 처해 있었다. 김춘추 김유신은 이때 당을 끌어들여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신라를 구한다. 저자는 그러나 "이들은 삼국을 통일해 어떻게 꾸려나갈지 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며 "고구려를 정복한 뒤 한강 이북 땅을 방치, 당에 넘겨주고 나중에 당이 신라까지 넘보자 그제서야 맞서 싸웠다"고 말한다.
조선말의 흥선대원군은 매우 복합적인 인물이다. 개혁정책을 펴면서도 경복궁 중건 등으로 백성을 피폐하게 만든 상반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대원군을 실학파의 주장을 총체적으로 수용한 인물로 그린다. 실제 경작지를 조사해 양반 사대부의 토지에 세금을 매겼고 양반이라도 병역을 이행하지 않으면 세금을 징수했다.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를 고루 등용했고 부패 무능한 관리는 가차없이 숙청했다.
대원군의 잘못으로 지적되는 경복궁 중건, 당백전 발행에 대해서도 저자는 "일부의 재력가들이나 피해를 보았지 일반 백성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고 옹호한다. 저자는 나아가 "동학 농민군, 한양의 빈민, 개화파, 심지어 상당수 보수파들까지 그를 지지한 것을 보면 그가 당시 사회문제를 해결할 적임자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며 "그런데도 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존재하는 것은 그의 개혁 정책으로 피해를 본 기득권층과 병인양요로 피해를 입은 기독교도들의 시각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저자는 "이 책은 통설에 대한 반론이기 때문에 재반론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며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지면서 역사 연구가 발전하면 인물에 대한 평가도 좀 더 정확해질수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단국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학교단과 갑오농민 봉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사는 없다' '한국사 그 끝나지 않는 의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등 역사 대중서를 혼자 또는 다른 학자와 함께 펴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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