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악령이 존재하고 그 악령에 의해 사건이 일어난다.인터넷 사이트 '하얀방'은 생명이 탄생하는 자궁이자 죽음을 예고하는 곳. 이곳을 접속한 여자들은 임신한 것처럼 배가 불러오면서 죽는다. 출세지향주의자인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의 애인으로 임신까지 한 방송국 다큐멘터리 PD인 수진(이은주)도 그 사이트에 접속해 죽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단편독립영화계의 스타 임창재의 상업영화 데뷔작 '하얀방'은 죽음 앞에 선 수진과 그녀의 다큐멘터리 주인공이자 사이버수사대 형사인 최진석(정준호)이 사건과 공포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미스터리 형식이다. 첨단 문명을 공포의 새로운 통로로 끌어 들었다는 점에서 '피어 닷 컴'이나 '폰'을 닮았고, 악령의 실체가 다름 아닌 한(恨)이라는 점에서 동양의 전통적 귀신관을 따르고 있다.
환영과 악몽, 죽은 여자를 단서로 귀신의 실체에 접근하는 수진. 알고 보니 그곳에는 한 여인의 억울한 죽음이 있었고, 그 죽음은 잉태된 생명과 모성애를 무참히 짓밟은 남자의 추악한 야망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남자는 지금 수진 가까이 있다. 영화는 공포 뒤에 숨은 가슴 아픈 사연과 반인륜적인 행위,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등장인물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그 비극성을 강조한다.
때문에 공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슬픔이 된다. 이런 느낌의 변화야말로 '하얀방'이가진 미덕이자 단점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애절한 모성애는 영화를 단순한 공포물로 받아들이지 않고 깊이 있는 감정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반면 치밀하고 날카로운 구성을 무디게 만든다. 남자에 대한 극단적 설정이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인 냉정한 추리력이 흔들린 것도 이 때문이다. 감독의 첫 장편이어서 그런지 이따금 호흡도 불안해 보인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하얀방'은 관객의 시선을 끝까지 붙들고 간다. 강한 사운드와 뻔한 트릭, 뜬금없는 영상 삽입의 잦은 반복으로 공포라기보다 '놀라움'만 강요하는 기존 영화와 달리 그림, 컴퓨터그래픽, 세트, 음악, 근접촬영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포심을 자극한다.
스토리 전개방식은 상투적이지만 나름대로 짜임새 있는 미스터리 구조를 갖춘 시나리오, 후반에 감정이입을 유도한 이은주도 큰 몫을 했다. '하얀방'에서 열연한 이은주는 두 가지 큰 것을 얻었다. '연애소설'에 이은 또 다른 연기 색깔과 이제는 혼자 영화를 끌고 갈 수 있는 힘과 자신감.
문제는 정준호이다. 촬영이 일부 겹친 탓이라고는 하지만, 사이버 수사대 형사로서 날카롭고 신세대 감각적인 캐릭터 구축은 고사하고 대사 발성이나 이미지가 '가문의 영광'의 주인공인 박대서와 너무나 비슷하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얻어낸 여성 취향의 감상을 강화해주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조연에 머물렀다. 그게 아니었다면 '하얀방'은 임창재 감독의 말대로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여러 코드를 자연스럽게 접목한 멋있는 장르영화(미스터리 공포물)"가 됐을 것이다. 15일 개봉. 15세관람가.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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