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속기록없이 "밀실담합"대선정국에 밀려 국회의 본령인 입법과 예산심의가 졸속으로 치닫고 있다. 각 당의 정치논리 탓에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주요 법안이 방치돼 사실상 폐기될 위기에 처한 반면 선심성 법안들은 제대로 된 심의절차도 없이 벼락치기로 처리되고 있다. 새해 예산안 심의는 촉박한 일정에 당리당략, 지역구 의원들의 이해까지 겹쳐 졸속심의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계수조정소위는 111조가 넘는 예산을 비공개로 다루면서 속기록조차 남기지 않는 밀실 심의의 악습을 되풀이 했다. 계수조정위원들 스스로 "내 지역구 예산도 못 챙기면 소위를 왜 하느냐"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로 지역구 챙기기는 노골적이다.
올해는 대선을 의식한 탓인지 선심성 증액이 상임위에서부터 기승을 부렸다. 건교위가 정부안보다 1조원 이상을 증액하는 등 상임위를 거치면서 4조2,000억원이나 늘어나 "상임위에서 1차적으로 정부안을 거른다"는 취지는 이미 공수표가 됐다. 지난해만 해도 10조원 이상 삭감을 주장하던 한나라당은 이번에는 "총액을 깎지는 않겠다"고 말해 야당의 삭감을 예상하고 부풀려 계상한 정부안에 대한 최소한의 심의기능조차 포기했다. 계수조정소위는 그나마 1조원 가량을 삭감하는 시늉을 냈으나 이 역시 막판에 끼워넣을 의원들의 지역구민원사업을 위한 '예산 돌리기'에 불과하다.
보다 못한 민주당 조순형(趙舜衡) 의원은 이날 논평을 내고 "계수조정소위의 지역구 민원챙기기식 밀실심의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며 회의공개, 속기록 작성, 의원들의 민원쪽지 밀어넣기 관행근절 등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 정창수(鄭昌洙) 시민행동 예산감시팀장은 "7년 넘게 예산안 심의를 지켜봤지만 이번처럼 '대충대충, 나눠먹기'식 심의는 없었다"며 "지역구 챙기기와 나눠먹기 같은 구태는 물론 대선 때문인지 올해는 모든 정당이 삭감엔 관심도 없고 증액에만 골몰했다"고 비판했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본회의, 3분마다 1건씩 통과
상임위의 졸속 심의만을 거친 채 본회의에 상정된 각종 법안이 무더기로 통과되고 있다. 7일 본회의에는 무려 64건의 법안이 상정됐다. 박관용(朴寬用) 의장과 김태식(金台植) 부의장이 잇달아 사회를 본 가운데 "이의 없습니까" "예"가 반복되며 법안은 3분에 1건 꼴로 의결됐다. 그나마 의원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는 바람에 회의 도중 의결정족수(137명) 미달로 예정된 의사일정을 마치지 못하고 산회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의원은 70명을 넘지 않았다. 본회의 상정 직전의 마지막 여과 장치인 법사위에서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법사위는 이날 하루 30여건의 법안을 심의했다. 상당수 법안은 대체 토론과 축조 심의를 거치지 않았다. 법사위는 전날에도 무려 63개 법안을 의결했다. 소관 상임위의 심의를 거쳤다고는 하지만 법사위의 자구 심사 등이 졸속으로 이뤄질 경우 다른 법규와의 충돌 가능성 등 적지 않은 문제를 안게 된다.
국민의 관심이 쏠린 민생법안이 외면당하거나 일부 법안이 의원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왜곡돼 통과된 것도 문제이다. 동성동본 금혼 해제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은 아직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주5일제 근무의 근거가 될 근로기준법 개정안과 의료분쟁조정법, 국민건강보험법 등도 다음 국회로 넘어갔다. 6일 재경위를 통과한 경제자유구역법은 지역구를 의식한 의원들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 일정 요건을 갖추면 지정 받을 수 있게 바뀌어 기본 골격이 허물어졌다.
/최성욱기자 feel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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