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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스파이캐처

입력
2002.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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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출간된 책 한 권이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MI5 간부였던 피터 라이트가 쓴 자서전 '스파이캐처'(Spycatcher)가 영국 정부의 법적 제재를 피해 겨우 햇빛을 본 것이다. MI5는 MI6와 더불어 영국의 양대 정보기관으로서 방첩업무를 주로 하고 있어 '스파이캐처'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이 책의 요지는 'MI5의 국장이었던 로저 홀리스가 소련의 이중간첩이었다'는 것이다.저자인 피터 라이트는 20년 동안 방첩요원으로 일하면서 중요한 첩자를 잡으려는 순간마다 놓치곤 하는 일이 반복되자 내부에, 그것도 아주 높은 곳에 첩자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오랜 내사 끝에 자신의 상관인 홀리스를 이중간첩으로 보고 뒷조사를 벌였다. 홀리스가 옥스포드 대학시절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렸다는 행적부터 시작해 그의 뒤를 샅샅이 캐고 다녔지만 결정적 증거를 잡지 못했다. 이 책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려는, 그래서 상관까지 의심하는 한 정보요원의 치열한 삶을 담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정보기관의 생명은 보안에 있다. 그래서 정보수집 못지않게 방첩의 기능이 마치 '칼과 방패'처럼 강조되고 있고, 몇몇 나라에서는 아예 두 기능을 떼어 별도의 정보기관에 맡기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 중앙정보부가 탄생할 때부터 지금까지 두 업무를 모두 한 기관에서 맡아왔다. 하지만 각종 부패사건에 간부들이 연루되는가 하면, 정권말기만 되면 '정치권 줄대기'로 인해 중요 정보들이 줄줄 새어나가는 현재의 국가정보원은 이제 정상적인 정보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잃었다.

특히 방첩의 측면에서 보면 국정원은 낙제점에 가깝다. 갑자기 돈을 많이 쓰고 다니는 직원이 있으면 당연히 적국의 매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뒷조사를 벌여야 했다. 그랬더라면 간부들이 진승현·정현준 게이트 등 각종 비리에 연루돼 '검은 돈'을 챙기는 일을 미연에 막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정보요원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정보기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설득 끝에 다행히 귀국했으니 망정이지, 망명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겠는가.

'정치권 줄대기'는 또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수 직원들이 상도동으로 정보를 흘렸고,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훨씬 이전에 동교동에는 중요 정보를 갖고 오는 직원이 있었다. 정권이 바뀐 다음 이들이 승진하거나 중요 직책을 맡았던 것은 이제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마당에 다음에 들어설 정권을 의식해 한나라당 쪽으로 국정원의 중요 정보가 넘어가고 있다는 것은, 굳이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언론 인터뷰를 빌지 않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스파이캐처'의 저자 피터 라이트에 의하면 정보요원이 조직을 배반하고 정보를 적국이나 외부에 유출하는 데는 세 가지 동기가 있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정치적 신념이나 개인적 이익 말고, 바로 조직에 대한 복수심의 경우가 있다. 현정권이 출범한 이후 국정원내에는 '능력도 없는 호남사람들이 중요 직책을 독식했다'는 불만이 돌고 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어서 빨리 '세상'이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다.

정보업무는 절대로 필요한 국가기능이다. 그러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보기관은 오히려 국가에 부담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지금 국정원은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할 게 아니라 중병(重病)에 걸려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수술에 나서야 한다. 더 이상 '과거의 신화'나 낡아빠진 '조직의 원칙'에 매달리지 말고, 눈을 크게 떠서 달라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정원 직원들에게 '스파이캐처'를 한번씩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신 재 민 논설위원 jm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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