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기준일차적 기준은 후보들이 어떠한 정치 목표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치 목표에는 후보자의 철학과 사상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구체화한 철학과 사상을 비교해 국민은 자신의 생각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후보자를 선택한다.
이와 동시에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을 위한 세부적 기준이 요구된다.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우리 현실에서 국가발전이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남북한 사이에 평화공존을 추구하고 나아가 통일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앙과 지방,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발전을 시정해 어느 곳에 살더라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혜택을 골고루 받도록 하는 것이다. 국민통합 역시 두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회 각 부문의 균열 현상을 치유해 계급적·계층적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를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있는 지역 균열구도를 타파해 화합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 세계화 시대에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위상을 확립하는 문제도 등한시할 수 없는 과제다.
■정치목표
이회창 후보의 경우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원칙 아래 '반듯한 나라, 활기찬 경제, 편안한 사회'를 제시함으로써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틀 안에서의 국가혁신을 표방하고 있다. 노무현 후보의 경우 '참여민주주의, 지속 가능한 성장, 사회적 연대, 보편적 세계주의'를 제시하면서 시장 만능주의에 따른 자본주의의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성장과 분배를 조화시킨다고 함으로써 분배에 역점을 두었다. 권영길 후보는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사회주의적 가치 계승'을 표방한 정당의 후보답게 '차별 없는 세상'과 '줏대 있는 나라'를 내세웠다. '새 정치'를 표방한 정몽준 후보는 출마 선언에서 '상식에 의한, 정치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제시하면서 월드컵대회 기간에 내외에 과시한 국민적 에너지를 통합하고 함께 전진하면 '살맛 나는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월드컵 열기가 자신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데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만만찮아 사고의 전환이 요청된다.
네 후보가 제시한 정치 목표를 분석할 때 자신의 정치철학과 사상을 나름대로 제시해 국민의 판단을 돕고 있는 후보는 이회창, 노무현, 권영길 세 후보라고 할 수 있다. 정몽준 후보의 경우 철학과 사상이 담긴 목표가 아직 구체화하지 않고 있다.
■국가발전
국가발전에 관한 비전에서 이 후보의 경우 민족공동체 회복으로 평화통일을 실현하며, 국토와 지역의 균형발전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견지하고 있는 전략적 상호주의와 민족공동체 회복이 과연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모순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노 후보는 평화로운 한반도 건설을 주장하면서 경제협력과 군사적 신뢰구축을 동시에 추진하되 남북 공동번영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금강산관광으로 동부지역에는 평화지대가 형성되고 있고 개성공단이 조성되면 서부지역에도 광범위한 평화지대가 조성되리라는 견해를 피력했는데, 최근의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엇갈리는 측면이 있어 보완이 요청된다.
이 후보와 노 후보가 자신의 철학에 입각한 통일방안을 나름대로 밝힌 데 비해 정 후보와 권 후보는 상대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는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정 후보는 현재의 불안정한 휴전체제가 평화체제로 바뀌면 남북의 공존공영을 공고히 하고 통일의 길을 열어 나갈 수 있다고 하면서도 "평화적 통일이란 모순된 단어"라고 발언해 혼란을 주고 있다. 전략적 차원에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유권자로서는 혼란스럽게 느낄 뿐이다. 권 후보의 경우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남한에서 먼저 70만명에서 50만명으로 병력을 감축하고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제의한 뒤 북한에 군축을 제의해 합의할 것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걱정하고 있는 국민 정서와 거리가 있다.
균형발전을 위해 이 후보는 '한국재건펀드' 조성, 공공기관과 공기업 국·공립대학의 지방 이전 등의 방안을 내놓고 지역발전은 지방분권에서 시작한다는 정신에서 '지방분권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지방분권으로 지방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것은 옳은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지금까지 다수당으로서 국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집권하더라도 공약이 지켜질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한편 노 후보는 수도권 집중형에서 지방분산형으로의 변화를 제시했다. 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한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일환으로 행정수도의 이전을 주장한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천문학적 비용도 문제이거니와 통일을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보다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정 후보는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해소하며 예산 배정의 편중을 막겠다고 밝혔다. 수도권에 국가권력의 90%, 고급정보의 99%가 집중되는 현상을 막겠다는 것이나 아직 구체적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권 후보의 경우 지방분권을 통해 불균형발전을 시정한다는 입장이다. 지방분권 추진법을 제정해 권한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고 국세와 지방세 구조를 혁신적으로 개혁해 지방 재정자립도를 높인다는 내용이나 실현가능성은 낮다.
■국민통합
국민통합 비전에서는 이 후보와 노 후보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한 반면, 정 후보는 구체성이 결여된 정책을, 권 후보는 현실성이 결여된 정책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 인적 통합을 위한 방안에서 이 후보는 사회보험제도의 내실화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확충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한 따뜻한 복지'를 실현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 후보는 정치경제적 갈등과 대립이 민주적 절차와 과정에 규율되는 통합의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정치 패러다임을 공정과 포용의 원리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실현 의지 유무를 떠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복지사회를 지향하고 국민통합을 모색한 두 후보와 달리 권 후보의 경우 국민통합이라는 말 자체를 부인했다. 국민통합은 기득권세력의 정치 용어이며,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대통령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그 대신 계급적 시각에서 접근, "기력을 상실한 노동자·농민의 원기를 북돋워 주고 일하자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후보의 경우 30년 묵은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고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해소해 국민통합을 이루겠다고 말하고 있다.
지역통합을 위한 지역 균열구도 타개책에서도 후보별 차이는 확연하다. 이 후보는 공정한 인사와 국민 대화합을 위한 인사 탕평책을 실시하고, '지역균형발전심의위원회'를 설치해 불균형 지역개발과 지역 편중을 시정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노 후보는 국가균형원을 설치해 지역갈등과 지역주의 극복방안을 마련하며, '전국시도지사회의'를 상설화해 지방 이익을 대변하고 지역 갈등을 조정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지역균형발전심의위원회'나 '전국시도지사회의'와 같은 제도가 없어서 지역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제도의 신설은 구색을 맞추기 위한 편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정 후보는 지역감정 타파를 위한 초당적 정국운영과 학연과 지연을 초월한 능력위주 인사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간적 제약 때문인지 평범한 정책 제시에 그쳤을 뿐 구체적 내용을 결여했다. 권 후보의 경우 진보정당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로 지역감정을 들고 이를 해소하는 길은 진보 대 보수 구도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감정 해소는 현재로서는 역부족이라고 시인한 권 후보는 보혁구도로 정국이 개편되면 지역 균열구도도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위상확립
이 후보는 세계의 중심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 격상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방안으로 외교의 다변화와 개도국과의 경제협력 확대 등을 제시했다.
노 후보는 다국적기업과 국제기구 등을 유치해 아시아와 세계의 중추국가로서 발전하는 전략을 마련하겠다고 밝혀 보다 적극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위상 제고를 모색하고 있다. 정 후보는 국익우선의 실리외교를 들고 그 테두리 안에서 전통적 한미관계의 발전과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 중국 러시아와의 우호협력관계 강화 등을 들었다. 권 후보는 전세계 진보정당의 단결 실현으로 미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 제 3세계의 논리를 추종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반적으로 이 후보는 보수층을 주요 대상으로 한 모범답안, 노 후보는 진보층을 대상으로 야심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두 후보는 비교적 고정적 지지계층의 취향에 맞는 공약을 제시하고 부수적으로 외연을 확대해 나가기 위해 수시로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정 후보는 아직 구체성이 갖춰져 있지 않고 지향점이 분명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권 후보가 지향하는 민중 주체의 정권은 일반 국민의 의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연(沈之淵) ·서울대 정치학과 졸·서강대 정치학 박사·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핫 이슈/수도기능 지방이전
'국가발전과 국민통합' 분야에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국민통합 21 정몽준(鄭夢準), 민노당 권영길(權永吉) 대통령후보 사이에 인식차가 두드러진 것의 하나는 수도기능의 지방 이전 문제다. 차기 정권에서 본격적인 지방분권 시대를 열어 국토의 불균형 발전과 지역간 위화감을 해소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이를 위한 주요 방안으로 제기된 수도 기능 이전에 대해서는 저마다 입장이 다르다.
9월 민주당 선대위 출범식에서 노 후보는 행정수도의 충청도 이전을 약속해 여론의 관심을 끌었다. 이에 이 후보는 행정수도 전체를 옮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면서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행정 기관을 분산하는 대안을 내놓았다. 정 후보는 국민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고 검토 수준으로 한발 더 물러서는 대신 대기업 본사의 지방 이전을 독자적 대안으로 제시했고, 권 후보는 실질적 지방분권이 선행한 뒤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고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노 후보의 발제로 나머지 후보들이 논쟁에 끌려 들어 온 양상이다. 국민 생활의 엄청난 변화를 불러 올 대형 현안이다 보니 누구든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국토의 균형개발이라는 당위론만으로 밀어 붙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행정수도 이전은 1971년 대선 당시 신민당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주장한 이래 여러 차례 등장했고 일부 기능의 지방 분산·이전이 실현됐지만 현실적 제약 때문에 전면적 이전은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또 박정희(朴正熙) 정권 말기에 만들어 진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실행 기간을 20년으로 잡았고, 87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대전을 행정중심 기능도시로 육성하는 계획을 발표한 이후 대전에 청 단위 행정기관이 들어서기까지 11년이 걸렸다. 독일 통일 후 베를린으로 수도를 옮기는 데는 9년이 걸렸다.
이런 예에 비추어 몇 년 사이에 행정수도를 이전하겠다는 약속은 실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졸속 공약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 때문에 특정 지역의 표를 겨냥한 대선 전략일 뿐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실제 노 후보가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제시한 배경에는 10%대로 곤두박질한 충청권의 지지율을 끌어 올리려는 의도가 깔려 있고, 이 후보의 5개년 이전 방안 역시 이 지역에서 자신을 앞섰던 정 후보를 의식한 포석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대선 후에 이런 청사진이 제대로 이행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다만 원래의 목적이 무엇이든 후보들 사이의 논쟁이 수도권 과밀 해소와 지역균형 발전에 대한 공론화를 촉발한 것은 장기적으로 국민적 논의와 합의 도출의 바탕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정책을 만든 사람들
한나라당의 정치분야 공약은 지난해 5월 발족해 1년 남짓 활동한 당 국가혁신위원회가 뼈대를 만들었고, 여기에 살을 붙이는 작업은 당 여의도연구소가 주로 맡았다. 국가혁신위에 참여했다가 최근 이회창 후보 특보단에 합류한 송영대(宋榮大) 전 통일원 차관, 유호열(柳浩烈) 고려대 교수 등이 마무리 작업에까지 관여했다.
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후보의 학계 자문그룹에 속한 정진영(鄭璡永) 경희대 교수, 백진현(白珍鉉) 서울대 교수 등은 실무 작업을 맡은 여의도연구소 정용대(鄭用大) 권영진(權泳臻) 연구위원에게 수시로 조언했다. 당 정책위원회는 이 자료를 넘겨 받아 구체적 정책 대안으로 다듬었으며 제1 정조위원장인 홍준표(洪準杓) 의원이 당 수석 전문위원들과 함께 공을 들였다. 정치개혁특위를 맡은 강재섭(姜在涉) 최고위원, 대선기획단의 정형근(鄭亨根) 의원 등도 활발히 의견을 개진했다.
민주당 정치분야 공약은 정세균(丁世均) 본부장이 이끄는 국가비전21위원회가 기본틀을 제시하고 임채정(林采正) 본부장의 정책선거특별본부가 여기에 살을 붙이는 과정을 통해 생산됐다.
국가비전21위원회에는 국민경선 당시부터 노 후보를 도왔던 정책자문교수단이 참여,실질적 브레인 역할을 했다. 김병준(金秉準) 국민대 교수, 정해구(丁海龜) 성공회대 교수가 정치분야 비전을 학술적으로 뒷받침 했고 특히 성경륭(成炅隆) 한림대 교수는 지방분권 분야에서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정책선거특별본부의 박주선(朴柱宣) 제1위원장은 이런 의견들을 모아 세밀한 검토 끝에 공약으로 만들어 냈다.
특히 노 후보는 본인 스스로가 정치개혁 분야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는 후문이다. 노 후보가 후보 확정 뒤 곧바로 정책팀에 "행정수도 이전을 검토해 보라"고 지시, 공약화한 것이 좋은 예이다.
국민통합 21의 정치분야 공약의 골격은 정몽준(鄭夢準) 후보에 의해 직접 만들어졌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정 후보는 국민통합, 초당적 정치, 원내 정당, 부정부패 타파 등의 정치개혁 방안을 제시해 왔다.
국제변호사로 세종대 부총장을 지낸 전성철(全聖喆) 정책위의장과 자문 교수단은 여기에 살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화여대 박준영(朴俊英·정치학) 교수는 국제정치와 북한 문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비전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남대 김연철(金煉喆· 정치학) 교수를 비롯한 학자 4,5명도 국민통합 및 국가발전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보탰다. 이철(李哲) 조직위원장과 박범진(朴範珍) 기획위원장 등이 의정 경험을 토대로 정치적 비전 관련 정책 다듬기에 참여했다. 정리 책임은 유몽희(柳夢熙) 부대변인이 맡고 있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최성욱기자 feelchoi@hk.co.kr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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