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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4)시인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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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4)시인 도종환

입력
2002.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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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오늘 내 삶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인가. 지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나팔소리인가. 다시 또 싸움터로 달려나가게 하는 깃발인가. "내 시 여기서 더 이상 필요없어, 나 또한 필요없게 되었다"며 목숨을 끊은 시인처럼 시가 곧 내 목숨인가, 나의 전부인가. 아니면 내 이름을 조금 더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에 불과한가.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일 뿐인가.내 문학은 가난과 외로움에서 출발했다. 평화롭던 날들은 열 몇 살 전후해서 끝났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고향을 뜨면서 우리 가족은 해체되었다. 나는 외가에 맡겨졌고 앞못보는 할아버지는 고모네 집에 고단한 육신을 의탁해야 했으며 어머니 아버지는 강원도로 떠났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혼자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방학 때가 되면 편지봉투에 쓰여 있는 주소를 들고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 다녔다.

부모가 있는 곳을 찾아 고등학교 진학을 했지만 거기서도 정착을 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또 경기도로 떠나면서 나 혼자 객지에 남겨지게 되었다. 자주 양식이 떨어졌고 낯선 도시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가난하기 때문에 포기했던 대학을 돈 제일 안 들어가는 대학, 돈 제일 안 드는 학과를 선택하여 시험이나 한 번 쳐 보라는 친척들의 권유로 사범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나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월세 이천 원짜리 단칸방에서 우리는 살았고 사 년 내내 구들장 위에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냉방에서 잠을 자며 대학을 다녔다. 살아 있다는 것은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도시락 대신 소주병을 싸들고 일터로 나가는 아버지, 고모네 목욕탕에서 막일을 하는 어머니, 정신지체 장애아인 여동생, 음성 나환자인 삼촌, 둘러보아도 사방팔방 절망 아닌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치스럽게 무슨 대학을 다닌단 말인가. 남들과 잘 어울리기 싫었고 자폐증, 대인기피증 비슷한 걸 앓았다. 나는 내 깊은 절망 속으로만 침잠했다. 그리고 거기서 문학을 만났다.

문학을 이야기하고 철학을 거론하는 자리에서만 눈빛이 반짝였다. 사르트르와 까뮈와 키에르케고르와 고흐와 이중섭과 장용학과 손창섭과 고은과 최인훈을,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이야기할 때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실존주의의 치열한 여름과 퇴폐적 낭만주의의 황폐한 가을, 그리고 지독히도 가난한 겨울이 몇 번을 찾아왔다가 나를 쓰러뜨려 놓고 지나갔다.

질척한 페시미즘과 우울한 낭만주의 문학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전혀 엉뚱한 데서 나를 찾아왔다. 80년 광주였다. 그때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광주에서 여수 쪽으로 내려오는 무장한 시민군 차량들을 저지하기 위해 십칠 번 국도의 한 고갯마루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언덕 양쪽에 호를 팠다. 그렇게 대치한 채 뜬눈으로 새우던 그 오월의 밤에 나는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M16 소총의 탄창을 몰래 빼서 맨 위의 실탄을 거꾸로 장전해 놓았다.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게 해 놓으면서 나는 두려웠으나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향해서 총을 쏠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군복 윗주머니에 들어 있는 군용수첩에다 시를 썼다. 그때까지 썼던 100여 편 가까운 시들을 다 버리게 하는 시였다.

"십칠 번 국도 위에서 역사를 우롱하던 바람은/ 한 찰나도 빼놓지 않고 피묻은/ 뻐꾹새 울음을 귓가에 실어오고/ 부대끼는 밤구름을 능선 위에 옮겨왔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도/ 이제 나의 개인화기는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역사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역사여…"

'사격명령'이란 시였다. 개인적인 절망에서 역사와 사회와 현실 쪽으로 유턴을 하게 한 시였다. 그러나 광주의 체험은 나 하나의 알량한 양심을 지킨 것으로 끝나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이었고,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나 갚아야 할 부채였다. 그렇게 역사를 끌어안고 눈물 흘리고, 시대의 고통과 함께 괴로워하면서 나의 문학은 현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로부터 꼭 이십 년이 지난 어느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 중에 나오는 광주 장면을 보다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눈물은 극장을 나와 길을 걸어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제대 후 문단에 나올 무렵, 우리에게는 발표지면이 없었다. 창비와 문지는 폐간되고 신문과 방송도 마구잡이로 통폐합될 때였다. 우리가 발표할 지면을 스스로 만들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배창환 김용락 김창규 시인 등과 함께 '분단시대'라는 동인지를 만들었다. '오월시' '삶의 문학' '시와 경제' '자유시' 등의 동인지와 '실천문학' 같은 무크지가 문단의 돌파구를 만들어 나가던 무렵이었다. 창비에서 첫 시집 '고두미마을에서'를 낸 것도 그 무렵이었다.

결혼 이년 여 만에 아내와 사별한 것도 비슷한 팔십년대 중반이었다. 절망은 내가 저를 떠났다고 저도 나를 떠난 건 아니었다. 많이 힘들었고 많이 아팠다. 그 어려운 시기에 실의와 좌절의 늪에서 나를 건져준 것은 시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빈 하늘을 향해 소리칠 때 시가 대답을 해 주었다. 내 외로움, 내 그리움, 내 슬픔도 시가 어루만져 주었다. 암병동 날바닥에 앉아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암 환자들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죽음과 맞서 싸우는데,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싸움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암병동'이란 시를 썼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이 시는 내 삶의 나머지 날들을 사는 동안 내 좌우명이 되었다.

교조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가 어미 없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 감옥에서 아들이 보낸 편지를 받고 감옥의 벽에 십자가를 그어놓고 울면서 기도할 때 시가 있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해직교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막막해 할 때도 시가 길이 되어 주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모두들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담쟁이'란 시처럼 내게 길이 되어 준 시가 많았다.

십 년 해직교사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나는 '부드러운 직선'이라는 시어와 만났다. 원칙을 잊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유연한 삶의 자세, 그것을 우리나라 고건축의 추녀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부채살처럼 퍼지는 추녀의 아름다움과 곡선의 미학은 휘어진 나무가 아니라 곧게 다듬은 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거리에서 머리띠를 묶으며, 싸움의 한복판에서 짐승처럼 끌려다니기도 하면서, 함성과 구호를 외치면서 살아오는 동안 거칠어질 수 있는 심성을 다시 온유하게 감싸준 것은 시였다. 시는 내 가장 가까운 길벗이었고 스승이었으며 애인이었다. 나를 이끌어주고 위로해주고 눈물을 닦아준 것도 시였다. 무엇보다 내 삶의 고비고비마다 길이 되어준 것이 시였다. 문학이었다. 길을 찾게 해 주었고 길을 놓치지 않고 갈 수 있게 불 밝혀 주었다.

이 땅에 가진 것 없이 외롭고 가난하게 태어나 문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절망과 시련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해 준 것이 문학이라서 문학을 하며 살게 된 것을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아직도 우리가 던진 교육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책임져야 할 몫이 남아 있어서 복직한 시골학교에 묻혀서 산다. 모순의 한가운데서 나를 다시 검증하고 거기서 다시 출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때가 언제일는지 모르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한적한 강마을로 돌아가/ 외로워서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쓸쓸한 집 한 채 짓고/ 맑고 때묻지 않은 청년으로 돌아가고 싶다." 거기서 정말 마음껏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

● 연보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1977년 충북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시 '고두미마을에서' 등 5편 발표 등단 1977년 충북 옥천군 청산고 교사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 1998년 복직·현재 충북 진천군 덕산중학교 교사 시집 '고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동화 '바다유리' 등 신동엽창작기금(1990) 민족예술상(1997)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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