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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大 개막 제4세대 중국/(중)후진타오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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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大 개막 제4세대 중국/(중)후진타오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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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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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胡錦濤·60) 국가 부주석에겐 '수아이꺼(帥哥·잘 생기고 멋있는 남자)'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은 누구도 그를 적으로 돌리기 어렵게 한다. 외유내강형 풍모는 중국의 예정된 4세대 핵심 지도자로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장의 무기였다.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지정된 계승자나 2인자만큼 위험한 자리도 없다. 마오쩌둥(毛澤東) 시대 린비아오(林彪) 전 국방부장과 류사오치(劉少奇) 전 국가주석, 덩샤오핑(鄧小平) 시대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子陽) 전 당총서기는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정치생명을 잃었다.1992년 鄧에 의해 4세대 지도자로 낙점된 뒤 지금까지 그에게 10년은 스스로 몸을 낮추고 웃으며 때를 기다리는 인고의 세월이었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경계심을 품을 경우 언제 칼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차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나다

胡 부주석은 42년 12월 몰락해 가는 차 상인의 집안에서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안후이(安徽)성 지시(積溪)현과 상하이(上海)로 설이 엇갈리지만, 중국 공산당 약력표에는 지시현 사람으로 적고 있다. 그는 병약해 사망한 모친을 대신해 친척 아주머니의 젖을 얻어 먹으며 자랐다. 중국 근대의 문호 후쓰(胡適)는 그의 먼 친척이다.

부친 후쩡위(胡增玉)는 상하이를 비롯한 강남 지역에서 벌이던 가업이 기울자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로 이사해 재기를 시도했다. 胡 부주석이 유년시절을 보낸 타이저우는 江 주석의 고향인 양저우(揚州)와 멀지 않다.

급우들보다 어린 다섯 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갔지만 胡의 성적은 체육과목을 제외하면 걸출했다. 중학교에서는 전과목에서 최우수 성적을 기록했고 성격도 매우 활달했다. 비록 부친의 사업은 신통치 않았지만 신중국 건국 후 그는 소자본가 집안의 출신 성분 불량자로 분류됐다. 그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칭화(淸華)대의 수리공정학과를 택한 것은 출신상의 약점 때문이었다.

■칭화대에서 공산당원으로 변신

17세 때인 59년 칭화대에 입학해 베이징(北京)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기를 맞는다. 온화한 표정과 사교성, 적극성을 인정받아 입학 다음해 칭화대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에 입단하게 된다. 공청단은 장차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터전이 된다. 공청단 문화공작단 서기로서 그는 무대설비를 비롯한 각종 공연 준비를 도맡았다. 문화공작단 활동 덕분에 간단한 춤과 사교춤을 익힐 수 있었다. 미인으로 소문난 부인 류융칭(劉永淸)과는 칭화대 시절 만났다.

칭화대에서 그는 정치적 미래를 인도해 줄 귀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칭화대 총장으로서 중앙 정치인과 관계가 밀접했던 장난샹(蔣南翔)이다. 胡의 재목됨을 높이 평가한 蔣 총장의 추천에 힘입어 그는 56년 정식 공산당원으로 입당했다.

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는 68년부터 1년 간 간쑤(甘肅)성으로 하방돼 수리전기부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하지만 간쑤성 하방 경험은 그가 장차 지방 지도자로 부상하는 기틀이 된다.

■지방 지도자로 강한 이미지 심어

胡의 정치인생에는 역시 칭화대에서 알게 된 동문 선배 쑹핑(宋平) 전 당중앙 조직부 부장이 후원자 역할을 했다. 宋은 80년 간쑤성 건설위 부주임으로 있던 胡를 베이징 중앙당교에 연수시켜 중앙 실력자들과 면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胡가 최고지도자 鄧의 기억에 남고, 당시 당총서기 후야오방의 신임을 받게 된 것은 이 기회를 빌어서였다.

82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선출돼 중앙으로 올라온 그는 84년 제1서기로서 정치적 도약을 준비했다. 85년에는 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에 임명되면서 중앙 지도부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를 밟게 된다. 구이저우성과 함께 그가 88∼92년 당서기로 재직한 시장(西藏·티베트) 자치구는 중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다.

시장 자치구 당서기 재직시 그는 고산지대에 적응을 못해 주로 쓰촨(四川)성 청뚜(成都)나 베이징에 머물면서 원격 근무를 했다. 하지만 89년 3월 시장 자치구에서 대규모 소수민족 소요가 발생하자 그는 지방 최초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현장 지휘를 통해 강경 진압했다. 그의 강경한 모습은 당시 개혁·개방의 후유증으로 고심하던 최고 지도부를 만족시켰다.

■4세대 예비주자로 중앙무대 진출

92년 당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胡가 일약 권력 핵심에 진입한 데는 지방 근무성적 및 당중앙 조직부장이었던 宋과의 관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10년 뒤를 준비하며 江 주석의 후계자를 물색하던 鄧에게 그를 강력히 천거한 사람이 宋이었다. 당내 젊은 피 수혈을 위해 원로 퇴진을 추진하던 鄧에게 宋이 자신의 퇴진과 胡의 발탁을 맞교환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상무위원으로 발탁됐을 때 胡의 나이는 50세. 지금까지 공청단 제1서기, 구이저우성 및 시장 자치구 당서기, 상무위원, 국가 부주석, 당중앙 군사위 부주석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는 최연소 기록을 잇달아 갱신했다.

그에게 중앙 진출은 외롭고 힘든 출발이었다. 중앙무대에 인맥이 전무하다시피했던 그를 빗대 '정치 개체호(個體戶·소자영업자)'란 말까지 나왔다. 여기서 그는 굴신하는 자세로 江 주석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시하며 생존 공간을 모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투항해 江 주석 파벌에는 들어가지 않는 중용을 지켰다.

■집안도 내팽개칠 정도의 청렴성

안후이성 지시현과 타이저우에는 胡의 친척들과 친구, 동문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특혜를 주지 않았다. 현재 지시현에 사는 그의 숙모는 도시개발 때문에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집이 헐려나갔지만 조카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타이저우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등 모교도 胡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청빈하기로 소문난 주룽지(朱鎔基) 총리도 최근 측근이 부패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胡 부주석 주변에서 지금까지 부패 사건은 전혀 없었다. 이번 공산당 16차 전국대표대회(16大)에서는 집권자가 사망 직전 후계자를 지정하던 과거의 '지정 승계'에서 후계자를 일찍부터 키우는 '육성 승계'로 제도가 탈바꿈된다. 이점에서 胡는 중국 공산당 역사 최초의 '육성 승계자'로 기록될 전망이다. 8일 胡 부주석은 10년을 기다려 온 16대에서 마침내 최고 지도자로 비상하게 된다.

/배연해기자 seapower@hk.co.kr

■후진타오 연표

▲1942년 12월:안후이(安徽)성 지시(積溪)현 출생

▲59∼64년:칭화(淸華)대 수리공정학과 수학, 공산주의청년단 입단, 공산당 입당

▲65∼68년:칭화대 수리공정학과 과학연구반 연구, 정치교육원 담당

▲68∼69년:수리전기부 현장 근무

▲69∼74년:수리전기부 813분국 기술원, 비서, 당지부 부서기

▲74∼82년:간쑤(甘肅)성 건설위 비서, 부주임

▲82∼84년: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 전국청년연합 주석

▲84∼85년: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85∼88년: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

▲88∼92년:시장(西藏·티베트) 자치구 당서기

▲92년∼:당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 서기처 서기

▲93년∼:중앙당교 교장

▲98년∼:국가 부주석

▲99년∼:당중앙 군사위 및 국가 군사위 부주석

■共靑團등 4개계열 인맥 구성

4세대 핵심으로서 후진타오(胡錦濤) 부주석의 정치적 과제는 당·정·군 요직에 포진한 장쩌민(江澤民) 주석 파벌의 인적 장벽을 넘는 것이다. 권력서열 5위로서 胡 부주석이 파벌을 형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인맥은 江 주석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이다. 하지만 10년에 걸친 중앙 정치무대 생활에서 상당한 세력을 쌓은 것도 사실이다.

현재 胡 부주석의 인맥은 4개 계열로 구성돼 있다. 胡가 제1서기를 지낸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지방 지도자군, 그가 교장으로 있는 중앙당교, 모교인 칭화(淸華)대 동문으로 구성된 칭화방(幇) 계열이다.

공청단 계열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당중앙 판공청 부주임인 링찌화(令計劃)다. 胡 부주석 아래서 공청단 판공청 주임을 맡은 적이 있는 令은 胡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 홍콩과 대만 언론은 최근 그가 핵심 참모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왕양(汪洋)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 장슈에쭝(張學忠) 국가인사부 부장, 톈충밍(田聰明) 관영 신화사 사장 등도 공청단 출신으로 胡 부주석과 가깝다.

지방 지도자로는 바이언페이(白恩培) 윈난(雲南)성 당서기, 쑹더푸(宋德福) 푸젠(福建)성 당서기, 왕러취앤(王樂泉) 신장(新疆)자치구 당서기, 리커창(李克强) 허난(河南)성 성장, 리윈스(李允石) 장쑤(江蘇)성 성장, 황화화(黃華華) 광둥(廣東)성 부성장 등이 胡 부주석 계열로 꼽힌다. 이들은 장차 胡 부주석의 지방 장악에 힘을 실어줄 전망이다.

중앙당교의 다수 이론가들은 胡 부주석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게 된다. 공청단 출신으로 중앙당교 부교장을 지낸 류성위(劉勝玉)은 최근 톈진(天津)시 당부서기로 발탁돼 중용될 것임을 예고했다.

칭화대 출신은 현재 부부장급 이상 고위관리가 300명에 가까워 '대청제국(大淸帝國)'으로 불린다. 江 주석의 측근인 쩡칭훙(曾慶紅) 정치국 후보위원 역시 동문이라 칭화방은 江 주석과 胡 부주석 계열로 나뉘어져 있다.

胡 부주석의 군부 내 인맥은 매우 약하다. 비록 1999년부터 당중앙 군사위 부주석을 맡긴 했지만 군부 최고 계급인 상장(대장) 현직자는 전부 江 주석이 임명했기 때문이다.

/배연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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