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에서는 수행의 첫 단계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라(一切放下·일체방하)'고 가르친다. 온갖 물질은 물론 생각까지 없애버리라는 뜻이다. 불가의 대표적 화두인 방하착(放下着)은 보다 큰 성취, 즉 깨침을 향한 철저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엄양(嚴陽)존자가 조주(趙州)선사에게 물었다(둘은 8세기 중국 당나라의 대표적인 수행자였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을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내려 놓아라."
도대체 아무 것도 지니지 않았는데 무엇을 버리라고 하는 것인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엄양존자는 다시 물었다.
"이미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얼 내려 놓으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짊어지고 가거라."
이 일화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마저 버리라는 조주선사의 가르침을 역설적으로 잘 말해준다.
국민통합21은 5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중앙당 창당대회를 열고 대선후보와 대표로 정몽준((鄭夢準) 의원을 선출했다. 정 후보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낸다. 그런데 국민통합21 창당대회는 한 가지 아쉬움을 남겼다. 정 의원은 후보로 선출된 창당 당일에도 대한축구협회장, 한일월드컵조직위 공동위원장,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등 체육 관련 직위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정 의원이 한일월드컵 이후 대선을 향한 행보를 해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지 주목하고 있었다. 이는 정 의원이 이들 직위를 대선의 득표 활동에 이용할 것이라는 얄팍한 생각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다. 도무지 국가원수직에 도전하는 사람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자리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축구협회는 사조직이 아닌 공조직이라는 점에서 회장직 유지는 불필요한 오해를 살 여지가 충분하다. 정 의원은 특히 FIFA 부회장직에 대해 "국익을 고려해 그만두는 게 바람직한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국가의 체통과 위신을 위해서라도 물러나야 마땅하다. 월드컵조직위 공동위원장직도 법적으로 언제든 사퇴가 가능하다. 스포츠 외교를 통해 한일월드컵을 유치하고 한국 축구의 4강 신화를 일군 정 의원의 공로를 폄하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외국의 경우에도 정당 후보가 선거전 각종 민간단체나 공조직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관례다.
최근의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 의원의 지지도가 주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유력한 후보임에 틀림없다. 만일 정 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그런 직위를 유지한 채 국정을 이끌어갈지 궁금하다.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비록 늦었지만 정 의원은 버릴 것은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그렇다고 수행자처럼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수행자의 마음가짐을 한번쯤 헤아려 보라는 의미에서 방하착의 화두를 인용했을 뿐이다. 정 의원이 염원하는 보다 원대한 목표를 위해서는―성취의 유무를 떠나― 작은 것을 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 기 창 체육부장 lk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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