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25일 제15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취임했다. 김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다. 소수 여당의 한계는 원내 과반수 정당인 한나라당의 정국 운영 비협조로 더욱 두드러졌다.여야의 첫 격돌은 김종필(金鍾泌) 총리의 임명동의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DJP 연합을 대선 패배의 근본적 원인으로 본 한나라당은 김종필 총리의 임명동의를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새 정부가 첫 단추를 꿰는 것을 막는 모습은 누가 봐도 바람직하지 못했다. 우리 당은 의원들의 자유 의사를 존중한 '크로스 보팅'(자유투표)을 당론으로 정했다. 그리고 2월27일, 총리 인준 협조를 위해 열린 청와대 영수회담에서도 나는 우리 당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경제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국정 공백이 계속 돼서는 안됩니다. 여야 모두 당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대국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나라당이 총리 인준에 반대한다면 당당히 국회에 들어가 표결을 통해 당론을 관철해야 할 것입니다." 김 대통령은 섭섭함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당은 취임식 날 오후에 열릴 예정이던 총리 인준을 위한 본회의를 거부했습니다. 국가 부도사태를 이제 겨우 막았는데 야당의 비협조로 국정이 마비되고 국제신용도가 추락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내가 극한 대치를 거듭하고 있던 여당과 한나라당 사이의 중재를 자임하고 나섰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3월2일 우여곡절 끝에 총리 임명동의안 표결이 간신히 이뤄지긴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상당수 의원이 백지투표를 하기로 한 것이 드러나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무기명 비밀투표 위배'라며 투표를 중단시켰다. 임명동의안이 처리되지 못하자 김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김종필 총리서리체제를 택했다.
국민신당은 대선에서 500만 표를 획득한 정당답게 여소야대 정국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지만 막상 선거에 임해서는 소수 정당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4월2일 실시된 대구 달성 등 4개 지역 재·보궐 선거에서 우리 당은 참패했다. 두 달 후의 6·4 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여당과의 연합공천 이야기도 나왔으나 이미 정국은 모든 것이 여야 다수당 위주로 전개되고 소수당인 국민신당의 설 자리는 없었다. 당은 최악의 상태로 빠져 들었다.
반면 지방선거에서 자신감을 얻은 여당은 힘으로 정국을 밀어 붙이려 했다.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안정의석 확보를 명분으로 본격적 야당의원 영입 작업에 돌입했다. 거대 여·야당 사이에 이뤄지는 이합집산은 국민신당에게는 집채만한 파도로 다가왔다.
나는 국민신당의 총재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한편으로는 정치 상황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지방선거가 끝난 후인 6월8일 기자회견을 자청, '동서화합을 위한 큰 틀의 정계개편'을 여야에 촉구했다. 망국적 지역감정과 지역 정당의 폐단을 뿌리뽑기 위해 국민회의 자민련 한나라당 국민신당 등 모든 정당이 함께 간판을 내리고 보다 큰 틀의 정계개편을 하자는 것이었다.
"현재 여권이 추진중인 의원 빼가기 식의 정계개편은 심각한 정치 혼란만 자초할 것입니다. 앞으로 정계개편은 노선과 정책에 따라 이뤄져야 하며, 동서화합으로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국가적 차원의 정계개편이 돼야 합니다."
6월16일 김 대통령이 3부 요인과 4당 총재를 초청해 방미 성과를 설명하는 오찬 모임에서도 나는 이를 되풀이했다. "정치가 경제위기 극복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의원수도 줄이고 선거제도도 영남이나 호남에서 다른 당 후보도 당선되도록 대선거구제 도입을 고려해야 합니다. 나라를 생각한다면 인위적인 정계개편보다는 국민 대연합이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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