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검사'가 마침내 떠났다." 이명재(李明載) 검찰총장이 4일 사표를 제출하자 후배검사들은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가 재임한 10개월은 검찰 사상 유례없는 격동기여서 아쉬움이 더했다.이 총장은 올해 1월17일 이용호(李容湖) 게이트의 유탄을 맞은 신승남(愼承男) 총장의 뒤를 이어 제31대 검찰총수에 올랐다. 부적절한 처신으로 고위간부들이 잇따라 낙마, 검찰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때였다. 이 총장은 로펌의 변호사인 '재야 인사'였으나 검찰안팎의 지지 속에 '소방수'로 등장했다.
이 총장은 취임사에서 "무사는 곁불을 쬐지 않는다"며 자기모순에 빠진 검사들을 질타하고 "기러기는 무리지어 날기 때문에 난폭한 조류가 덤비지 못한다"며 단결을 강조했다. 이후 이 총장은 007가방 하나만 들고 다녔다. 골프채도 버리고 산책로까지 바꾸며 외부와 담을 쌓았다. "검찰총장이 아니라 수도승 같다"는 평도 나왔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 달리 검찰안팎의 상황은 또다른 비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봄이 오기 무섭게 대통령 아들 김홍업(金弘業)·홍걸(弘傑)씨의 비리수사를 떠안으면서 청와대·여권으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내부적으로도 신 전 총장 등 친정 식구들을 기소한데 대한 반발이 커지자 7월초 한차례 사표를 제출했다 반려받기도 했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장남 정연(正淵)씨 병역비리 의혹이 불거졌다. 이 총장은 안팎의 수사유보 의견에도 불구, 서울지검에 수사 일체를 맡기고 외풍막기에 진력했다. 이 과정에서 여·야 정치권은 이해에 따라 검찰을 흔들어댔고, 검찰도 내부 불협화음을 내보이는 자중지란에 빠졌다. 일련의 혼돈을 지켜본 검사들은 "그가 있었기에 그나마 이정도"와, "너무 관망하다 적시에 불화를 진압하지 못했다"는 엇갈린 평가를 내놓았다.
그러나 지난달 26일 피의자가 조사 중 숨지는 일이 벌어지면서 법무장관·검찰총장 동시 사퇴론이 제기됐다. 이 총장은 마침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내던졌다. 1988년 총장 임기제가 도입된 후 6번째 중도하차였다.
/손석민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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