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관리 체제'에 들어 간 나라는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통령 선거 투표일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청와대 지원설로 급작스럽게 하락세를 보인 이인제(李仁濟) 후보의 지지율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국민신당=YS당'이라는 인식은 국민들 머리 속에 또렷하게 각인돼 지지율을 끌어 내렸다.이 후보는 3차례에 걸친 후보간 TV 합동토론회에서는 상당히 선전했다. 그러나 TV 연설은 4번 밖에 못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거전 중반부터는 광고료와 홍보물 제작비 등 밀린 돈을 받으러 온 수십 명의 빚쟁이들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총재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농성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나는 비상 계단을 통해 총재실에 드나들어야 했다. 청와대의 지원을 받았느니, 손명순(孫命順) 여사한테 200억원을 받았느니 하는 모략에 걸려 결정적 타격을 받은 국민신당이 돈이 없어 TV 연설도 못하고 빚 독촉에 시달리는 현실이 그제서야 알려졌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선거전 막바지인 12월8일에는 한나라당의 박찬종(朴燦鍾) 고문이 국민신당에 들어 왔다. 그는 곧바로 부산·경남 지역 유세에 투입됐지만 이미 "이인제 후보를 찍으면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당선된다"는 이회창(李會昌) 후보 진영의 논리가 먹혀 들어가던 때여서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2월14일 이회창 후보의 서울법대 동기 동창으로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모 인사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이회창, 이인제로 나뉘어 싸워서는 대선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이인제 후보를 책임 총리로 삼는 것을 비롯한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 들일 테니 이인제 후보를 사퇴시켜 주십시오."
나는 이 제안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비슷한 내용의 제의가 한나라당 인사들로부터 비공식적으로 전달돼 왔고, 이를 당 지도부가 심각하게 논의한 일이 있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자는 의견이 일부에서 있었지만, 이 후보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끝까지 가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정도 상황이면 이회창 후보가 직접 찾아오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총재인 나에게나 이인제 후보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한나라당측 제의를 거절했다.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우선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그런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기에는 때가 늦었습니다. 또 이회창 후보가 TV 토론회 등에서 '이인제 후보가 사과를 하고 오면 받아 주겠다'는 식의 고압적 자세를 보여 왔기 때문에 우리측 감정이 악화해 있습니다." 나중에 이인제 후보에게 전말을 알렸더니 이 후보는 내 결정을 지지했다. "내 생각도 같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이 때 나를 찾아 온 인사를 지금 당장 밝히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한다. 당시 그 인사와 나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했다. 그 인사의 뜻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이를 털어놓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그가 양해를 한다면 밝힐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마침내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국민회의의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김대중 후보가 10,326,275표(40.3%), 이회창 후보가 9,935,718표(38.7%), 이인제 후보가 4,925,591표(19.2%)를 얻었다.
선거 후 이인제 후보가 결국 김대중 대통령을 당선시켰다는 분석이 무성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시 이회창 후보가 조금만 더 아량을 발휘해 이인제 후보를 포용했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인제 후보는 꿈을 이루지 못했으나 우리 모두 후회 없는 싸움이었다고 평가했다. 맨주먹으로 출발해 온갖 중상 모략에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도전했던 '새 정치의 길'은 훗날 제대로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