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돌아와 TV를 보는데 우연히 강원도 정선이 나왔다. 어릴 때 교과서에서 본 5일장 이야기도 나왔다. 아내 하고 정월 대보름 때 나물 먹으러 가자며 별 생각 없이 여행을 떠났다. 태백을 지나다 막상 사북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쇼크를 잊을 수 없다. 온 세상이 새카맣다고 할까, 흥분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서양화가 오치균(46)씨는 최근 5년간 사북의 풍경만을 그려왔다. 한 시절 탄광촌의 대명사로 호황을 누리다가 폐광 이후 사람들이 떠나면서 버림받은 도시로 쇠락, 다시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호텔과 술집과 아파트가 난립하며 변해가고 있는 사북이다. 오씨는 50여 점의 사북 그림만으로 6∼18일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02―736―1020)에서 전시회를 연다. 전시장에 못다 건 그림까지 140여 점을 모아서는 화집 '사북 그림집'도 냈다.
오씨는 고집스럽게 전통 구상 회화의 길을 걸어온 작가다. 유학했던 미국의 뉴욕과 산타페, 귀국해서는 서울의 모습 등 늘 자신의 주변 풍경을 그려왔다. 그의 그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손가락이나 손바닥 전체로 물감을 크림과 같이 두텁게 층을 지어 발라 올리는 지두화(指頭畵)이다. 그래서 오씨의 그림은 평면회화이면서도 조각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한 질감을 획득한다. 대상을 클로즈업시키거나 원근을 무시하는 파격적인 구도도 여전하다. 무엇보다 그의 그림은 언뜻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 들 정도로 착 가라앉아 있다.
사북의 풍경은 오씨 그림의 이런 특성들과 무엇보다 잘 어울린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퇴락한 마을, 한때는 노동자들로 북적거렸던 산 중턱 집단촌의 잿빛 골목길과 빛바랜 상가의 간판과 주인없는 장독대와 저 홀로 피어난 풀꽃들이 묘하게 아련한 정조를 부추긴다. 평론가 정영목은 그래서 오씨를 "원천적으로 인간의 삶의 그늘 같은 부정적인 측면에 서려 있는 기운을 끄집어내는 심미적인 페시미스트"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 그의 사북 그림에는 단지 이런 어두움이나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틋한 향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두터운 화면의 질감과 가라앉은 색조 사이로 먹구름이 걷히듯 빛과 밝음이 공존한다. 폐허의 남루한 지붕과 벽면을 내리쬐는 햇살, 구불구불한 골목길 담벼락에 피어나는 이름모를 꽃들이 그렇다. 작가는 "사북을 그리면서 슬픈 과거사와 새로운 변신으로의 진행을 함께 목격했다"고 말했다. "산타페가 황토색이라면 사북은 검은 탄 색이다. 그렇게 '살아 있는' 사북의 모습은 얼마나 소박하고 아름다운가. 거기 다시 아무 계획없이 건물들이 들어서며 사북이 파괴되는 걸 보면 울화가 치민다"고 한다. 잿빛 어둠의 땅을 기록하면서 그가 새삼 발견한 것은 건강한 생명의 빛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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