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장명수 칼럼]"흉기"가 된 신용카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장명수 칼럼]"흉기"가 된 신용카드

입력
2002.11.04 00:00
0 0

카드 빚에 몰려 고민하던 20대 부부가 자녀 2명을 목졸라 살해하고 자신들도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최근 대전에서 일어났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살 살인 강도 절도 사기 등 매일 쏟아져 나오는 온갖 사건의 배후에는 적잖이 카드 빚이 있다.빚에 몰린다고 다 범죄를 저지르느냐, 강도질을 해서 턴 돈으로 카드 빚 갚는 사람 봤느냐고 항변하는 카드회사 직원을 만난 적이 있다. 쉽게 낭비하고 빚 지고 나쁜 짓 하는 인간들이 문제지 신용카드가 원흉인 것처럼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카드가 원흉일 수는 없다. 그러나 신용카드 회사들은 카드 빚으로 인한 범죄들에 대해서 도의적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카드 회사들이 거리에서 행인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카드발급 경쟁을 벌일 때 이 같은 사태가 충분히 예견되었다. 가족계획 운동이 한창이던 30, 40년 전에는 지하도 입구 같은 데서 피임도구를 나눠주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 때도 놀랐는데, 이번에는 신용카드를 거리에서 보급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학생이나 직업이 없는 사람도 선물까지 받으며 손쉽게 신용카드를 얻게 됐다.

이런 과열 경쟁 속에 성인 1인당 카드보유가 평균 4장에 이르고, 한국인들은 신용카드라는 요술방망이에 홀리게 됐다. 현금이 없어도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고, 유흥업소에 가서 즐길 수 있고,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니 신용카드만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한국인들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신기한 세상이었다. 카드 현금대출이 금년 1·4분기에 100조원을 돌파했다.

신용카드 회사들은 호황을 누렸다. 은행들이 본업보다 카드 장사로 떼돈을 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은행들이 지난해에 비해 2배이상의 순익을 기록한 금년 1·4분기에 수익금의 41%가 카드 수입이었다. 그러나 길에서 끌어들인 고객들이 카드회사의 수익을 계속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신용카드 연체율이 계속 높아지기 시작했다. 연체율이 10%에 이르러 미국의 2배나 됐다. 황금알을 낳던 카드업계에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카드 쓰는 재미에 빠졌던 많은 고객들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자살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인격파탄 가정파탄이 속출하고 있다. 신용을 지키기 힘든 사람들에게 남발했던 카드는 그 자신과 사회를 해치는 흉기가 됐다. 카드회사들은 호황을 즐긴지 불과 몇 달만에 심각한 경영난에 부딪쳤다.

자업자득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신용카드 회사들은 말 그대로 신용이 생명이다. 신용도 낮은 고객을 양산하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카드회사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 행인들 옷소매를 이끌며 카드를 남발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구나 우리는 불과 5년 전에 IMF사태를 겪었다. 그때 우리는 '거품'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사회 곳곳에 만연했던 거품이 걷히자 국가경제의 실체가 드러나고 나라가 부도위기에 몰렸던 무서운 경험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카드 회사들은 자신이 만든 거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신세가 됐다. 온 나라가 비이성적으로 흥청거려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탄탄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금융업은 끝까지 정신차리고 있어야 할 대표적인 업종이다. 금융업체까지 이성을 잃는다면 국민이 불안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신용사회로 가는 걸음마를 겨우 시작한 우리가 이처럼 천박한 소동을 겪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가장 보수적이고 신중해야 할 금융업체들이 천박한 소동을 주도했다는 것은 더욱 유감스런 일이다.

신용카드 소동은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카드 빚을 지는 금치산자들의 문제이기 이전에 신용이 무엇인지 이해 못 하는 신용카드 회사들에 대한 경보다. 그것은 총체적인 위기의 신호다. 우리가 거품의 공포를 배우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본사 이사 msch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