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한국당 탈당에 이어 1997년 10월31일 서석재(徐錫宰) 김운환 한이헌(韓利憲) 의원이 당을 떠났다. 11월2일에는 다시 박범진(朴範珍) 이용삼(李龍三) 김학원(金學元) 원유철(元裕哲) 의원이 탈당했다. 모두 이인제(李仁濟) 후보측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탈당 후 때로는 여럿이서, 때로는 개별적으로 나를 찾았다. 신당의 총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이들은 간곡하게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바로 며칠 전에 나는 3년이나 남은 의원직을 내던지고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게다가 평생 정치를 하면서 산전수전을 겪은 나로서는 몇 명 되지 않는 의원들로 신당을 만들어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주위의 반대도 잇따랐다. 신당측에서 나의 영입을 위해 뛰고 있다는 보도가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왜 그런 고생을 자청하려느냐"며 말렸다. 특히 출신지인 대구쪽에서의 반대는 더욱 심했다.
그러나 신당측의 집요한 설득은 계속됐다. 특히 "3김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를 펴 나가려면 원로가 뒤에서 밀어줘야만 가능하다"며 매달리는 데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나는 다시 현실 정치에 뛰어들기로 했다. 하늘이 도와 내가 직접 큰 뜻을 펼 수 있다면 내가 나설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정치 원로로서 대접만 바라고 있을 게 아니라 이 나라의 세대교체와 새로운 정치를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도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11월3일 나는 신당에 입당했다. 입당 환영식에서 나는 비장한 심경으로 입당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저는 이 땅에 새로운 정치와 세대교체를 이룩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과 함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제 우리 정치는 진정 새로워져야 합니다. 저는 이 땅에 기필코 새로운 정치를 이룩하고자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1세기를 앞둔 오늘, 이 나라 정치가 또 다시 구 시대의 음습한 밀실로 회귀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새 정치와 구 정치, 이 나라의 새로운 미래와 어두운 과거와의 싸움입니다. 이제 우리 다 함께 새로운 날을 해 온 국민과 함께 힘을 모아 나아갑시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선택한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입당 바로 다음날, 그러니까 국민신당 창당대회가 열린 11월4일 아침, 나는 한 조간신문을 펼쳐 보고는 경악했다. '청와대, 국민신당 창당 지원'이란 주먹만한 제목의 머릿기사가 실려 있었다.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양측의 공격을 함께 담은 기사로 "청와대가 본격적인 이인제 지원에 나서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신한국당 김윤환(金潤煥) 선대본부장의 폭로도 함께 실렸다. 김광일(金光一) 청와대 정치특보가 자신을 찾아와 이회창(李會昌)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이인제씨를 지원할 것을 권유했으나 자신이 이를 거절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정치판이 살벌하다 해도 창당대회 당일 이럴 수가 있는가."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속으로 삼키며 전당대회장으로 향했다.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국민신당 창당대회에서 4,000여 대의원들은 나를 국민신당의 총재로, 그리고 이인제씨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박 대통령을 따라 정치를 시작한 이래 거대 여당도 해 보고, 자그마한 야당도 해보았다. 또 창당을 해 보기도 했고, 그 당이 해체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런 나로서는 실로 만감이 교차한 순간이었다. 나는 총재 취임사 연설 말미에 아침에 청와대 지원 등 허위사실을 보도한 일부 언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 다른 당에서 우리 국민신당과 이인제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올라 가자 청와대가 우리 당을 지원하는 것처럼 중상모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힘을 바탕으로 이 나라의 미래와 새로운 역사를 위해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바쳐 떨쳐 일어섰노라고 자랑스럽게 우리 후손들에게 말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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