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의 지지율은 바닥을 탈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후보의 당선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당 내분이 봉합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회창 후보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갈등은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여당이 이렇게 혼란에서 헤어날 조짐을 보이지 않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경제는 눈에 띄게 악화해 갔다. 하락을 거듭하던 주가는 김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할 무렵 500선마저 무너졌다. 환율도 그때 벌써 더 이상 시장 기능에 의존하지 못할 정도였다. 정말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치인이라면 정권 재창출이니, 정권 교체니 하는 구호를 외칠 게 아니라 경제 살리기에 팔을 걷고 나서야 했다.
여당이 혼란에 빠져 헤매고 나라 사정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이회창 진영 대 반 (反) 이회창 진영의 당내 대립 구도에서 중립적 위치를 지켜 온 나도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여당이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이회창 후보 체제로는 그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모두를 포용하는 화합 정치를 하기에는 이후보는 적합할 것 같지가 않았다. 대선 승리도 무망하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내가 이 후보로부터 결정적으로 마음이 떠난 것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정치 행보 때문이었다. 이 후보는 자신을 감사원장, 국무총리, 그리고 여당의 대표로 기용해 대통령후보 자리에까지 이르게 한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김 대통령에 대해 아무런 격식도, 예의도 차리지 않은 채 당을 떠나라고 요구하는 것은 나로서는 결코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솔직히 김 대통령이 후계자 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것도 신한국당에 정이 떨어진 한 요인이었다. 이 때문에 민주계 역시 사분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가 만들어져 대안 모색에 나섰지만 이 또한 혼란만 불렀다. 이인제(李仁濟) 경기지사가 경선에 불복, 독자 출마를 최종 결심한 것도 김 대통령의 영향이 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로 정치가 갑자기 지긋지긋해 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총재와 명예총재가 화형식까지 하면서 서로 싸우는 정당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내키지 않았다. 이런 정치 현실에 대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 나만이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97년 대통령선거를 두 달도 남기지 않은 10월28일 나는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나는 전국구 의원이었으므로 탈당과 동시에 의원직을 잃었다. 국회의원이 대통령 선거에 나가기 위해 의원직을 버리는 등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스스로 3년이나 남은 의원직을 버린 예는 헌정사상 처음이었다.
주위에서는 "3년이나 남은 국회의원직을 왜 포기하려고 하느냐"며 나를 말렸다. 그러나 이런 정치 현실에서 국회의원 3년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40년 동안 정치를 해 오면서 나는 국회의원에게 주어지는 갖가지 특혜나 유·무형의 이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명예를 소중히 여겼고, 국민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여겼다.
나는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한 직후 의원회관 239호 내 방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신한국당이 유례 없는 파국에 직면한 데 대해 당의 원로로서 국민에게 죄송하고 스스로 책임을 통감합니다. 오늘의 정치 혼란에 책임을 지고 국민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당 상임고문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합니다. 평생 정치를 해 온 나는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몸으로 느끼며 국민 앞에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정치가 더 이상 국민의 짐이 돼서는 안 되며 우리 정치는 이제 새로워져야 합니다. 정치인은 대권보다는 나라를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 주길 마음속 깊이 기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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