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도 가을도 모두 사라졌어요…."지난달 하순부터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초겨울 날씨가 계속되면서 이 같은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무더운 봄에 이어 가을까지 추워 올해도 계절이 여름과 겨울 밖에 없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 그러나 '봄·가을' 실종은 푸념의 대상만은 아니다. 지난 10년간의 각종 기상통계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그 원인 등을 놓고 기상·환경 전문가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10년간 한반도 기온상승 뚜렷
우선 최근의 상황을 보자. 1998년 이후 올 봄까지 5년 연속으로 4, 5월(봄)과 9, 10월(가을)의 월평균기온이 지난 40년간의 평균기온 보다 높았다. 우리나라의 전형적 봄·가을 날씨는 줄고 여름 기후는 늘어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99년과 2000년에는 9월 중순에도 낮 최고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는 '더위 먹은 가을'이 계속되기도 했다.
올 가을은 영 딴 판이다. 예년과 달리 추위가 빨리 찾아오면서 '가을 실종'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기상청이 올 가을 한파의 원인 중 하나가 태평양 한가운데 자리잡은 엘니뇨가 한반도 상공에 머물고 있는 찬공기의 출구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것을 볼 때, 올해 추운 가을도 예년의 더운 가을과 근본원인은 동일한 셈이다. 이에 따라 일부 기상학자들은 "한반도가 봄·가을 구분이 불분명한 아열대기후화하고 있다"는 예측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기상청 권원태(權琬台·여) 기후연구실장은 "90년대 이후 전세계적 온난화 현상은 통계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라며 "앞으로 10년 뒤 평균기온도 현재보다 오르리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고 말한다.
■일년간 계속된 기상이변
올해 2월 미국 국립대양대기청(NOAA)이 강력한 엘니뇨 발생 경고를 내리자, 세계 각국은 '엘니뇨 대책' 수립을 위해 비상이 걸렸었다. 그러나 97∼98년 위력을 떨쳤던 엘니뇨는 결국 지구온난화 현상과 함께 폭우를 쏟아 8월말 동유럽 다뉴브강의 범람·중국 2대 담수호인 둥팅(洞庭)호 범람위기 등을 가져 왔다.
200만마리 이상의 가축이 폐사한 서남아시아의 극심한 가뭄 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올 한해동안 지구촌을 괴롭혔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올해 봄도 4, 5월 평균기온이 평년에 비해 1도 이상 높은 무더운 봄을 기록했으며, 7월말 8월의 국지성 호우로 전국이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되는 등 사상최대의 피해를 낳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무더운 봄과 장마철 이후의 국지성 호우를 지구온난화에 따른 중국 대륙의 고온화 현상을 주 원인으로 보고 있다.
또한 통상적으로 봄철에 페루 인근 동태평양에서 엘니뇨가 나타나면, 가을에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로 미뤄 볼 때 올 가을 한반도의 가을한파 역시 2월 미 국립대양대기청의 예보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봄·가을 실종은 인간 탓'
공해 증가에 따른 온실효과와 지구온난화의 상관관계는 환경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은 주제. 하지만 유엔환경계획(UNEP)이 최근 "남아시아 지역의 하늘 2,560만㎢ 넓이에 두께 3㎞의 대형 오염구름층이 뒤덮고 있다"고 밝히면서 다시 한번 이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UNEP는 '아시아의 갈색 구름층'(Asian Brown Cloud)으로 이름 붙여진 이 구름을 올해 서남아시아의 호우와 극심한 가뭄 등을 일으킨 기상이변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하지만 온실효과와 기상이변간의 상관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기상청 권 실장도 "최근 10년간의 기온 상승만으로 한반도 기후가 변화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100년 이상의 기간을 놓고 본다면 최근 10년의 기온상승도 의미 없는 예외현상 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영오기자young5@hk.co.kr
■춘추복 매출급감 의류업계 울상
지난달 하순부터 기온이 평년에 비해 7도 가까이 떨어지면서 가을이 일찍 사라져버리자 의류업계는 온통 울상이다. "이러다 봄·가을 패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지는 게 아니냐"는 걱정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 여성의류업체 관계자는 "과거 봄·가을과 여름·겨울 상품의 비중은 45%대 55% 정도였다"며 "3개월 정도씩 이어지던 봄·가을 시즌이 1개월로 짧아지면서 최근 몇 년 사이 봄·가을 상품비중이 30%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동·남대문 등의 의류업계는 올 가을이 일찍 마감된 것이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다. 동대문 프레야타운의 전우동 과장은 "추석이후 가을경기가 실종상태였는데, 추위가 일찍 찾아와 겨울옷을 찾는 사람이 크게 늘어 한숨 돌렸다"고 귀띔한다.
빨리 찾아온 추위 때문에 누구보다 반가운 사람들은 스키 등 겨울 레저산업 종사자들. 스키장비를 판매하는 김모(서울 강남구)씨는 "스키장비 판매고가 지난해에 비해 30% 정도 늘었고, 날씨가 추워져 스키장도 예년보다 5일 정도 빨리 개장할 것으로 보인다"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 같은 봄·가을 실종으로 백화점 등 대형유통업체는 전통적인 봄·가을 정기바겐세일보다 여름·겨울상품 기획전 등에 비중을 두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가전제품의 경우도 보통 5∼6월이 돼야 본격적인 예약판매가 이뤄지던 에어컨 판매가 4월부터 시작되는 등 전통적 계절마케팅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정영오기자
■유엔환경계획 한국위원회 권숙표 부총재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봄·가을 실종은 대기오염이 만들어낸 지구온난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 환경학계의 대부로 알려진 권숙표(權肅杓·82·사진) 유엔환경계획(UNEP) 한국위원회 부총재는 세계를 괴롭히고 있는 기상이변을 막기 위해 전 지구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권 부총재는 "현재의 지구온난화 경향은 장기적 기온변화패턴과 대기오염에 따른 온실효과가 결합된 것이며, 대기오염이 기상이변을 일으키는 메카니즘은 UNEP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실시한 '아시아 갈색 구름층' 프로젝트에 의해 입증됐다"고 설명했다.
권 부총재는 특히 목재나 가축배설을 이용한 난방과 산불 등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구름층이 홍수와 가뭄 등 기상이변은 물론 수십만명에게 호흡기질환의 고통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의 산업화 방식은 저개발국에게 더 가혹한 고통을 주고 있다"며 슬픈 환경현실을 전하기도 했다.
권 부총재는 미국에 대한 고언도 서슴지 않았다. "전세계가 힘을 합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규제하기로 한 교토기후협약에 미국이 조속히 재가입해야 만 그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미국이 가장 많은 배기가스를 내 뿜는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연세대 예방의학과 교수로 한국의 환경학을 개척해 온 권 부총재는 최근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공동의장을 맡는 등 정년퇴임 후에도 환경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다.
/정영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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