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결혼도 않고, 운동권으로 늙어 죽을 것만 같던 딸이 남편감을 데려왔다. 부모는 조건을 따질 겨를이 없다. 딸이 변한 것이 반가울 뿐이다.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년), '낮은 목소리'(1995년), '숨결'(1999년) 등으로 여성과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덤벼들어 만만치 않은 성과를 건진 변영주(36)감독을 보는 영화계 일부의 시선도 그런 것이 아닐까.
변영주 감독의 말투는 쾌활하고 시원하다. "나 자신이 얼마나 끈끈하고 칙칙하며, 멜로적이며 신파지향적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에 대한 반응이 어떠냐는 질문에 "영화를 잘 본 사람은 '영화 볼 줄 아는 사람', 영화를 비난하는 사람은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규정한다.
―다큐를 만들던 여성 감독이 소위 '벗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데 대한 호기심이 많다.
"감독은 일종의 '삐끼'다. 극장에 오는 사람들은 일종의 '불륜'(그는 아직도 이런 단어가 있는 게 싫다고 했다)을 보러 오는 것이지만, 그들로 하여금 나갈 때는 스스로의 욕망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여성들로 만들고 싶다."
―소설은 미흔이 육체 '게임'에 빠지는 동기를 충분히 설명하는데, 영화는 생략이 많아 뜬금없어 보인다. "게임 할래요" 라는 남자의 대사도 그렇고….
"미흔의 행위가 설득력을 가져야 하는 데는 반대한다. 남편을 '착한 남자'로 설정한 것도 그런 이유다. 그냥 몸이 부르는 대로 그렇게 산 여자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은 용서나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 여자에게 바람을 집어 넣는 영화라는 비난을 들으면 어떻게 하나.
"나쁠 것 없지 않나.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영화가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관객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인다."
―원작의 애독자는 어쩌면 가장 먼저 영화의 비판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부담이 적잖았을 것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생각만큼 부담이 크지 않았다. 원작의 대사 중 단어 한 두개만 바꾸어 나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가 서로 호환성이 없는 매체라는 생각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갖게 됐다."
―'격정 멜로'라는 수식과 달리 베드신이 꽤 차분하다. 노출이 약하다고도 하고. 감독이 미혼이라 그렇다고도 얘기하는데.
"그런 말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니들이 나를 알아' 이렇게 답했다. 노출과 관련해서는 모든 게 의도적이다. 김윤진에게도 '마지막 섹스 후 말고는 벗은 모습을 관객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섹스신? 나는 어떻게 해도 봉만대 감독보다는 못 찍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만의 섹스신이 필요했다. 몸이 열리는 순간의 감정을 주고 싶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가장 비참할 때는 배신을 당했을 때가 아니라 사랑한다고 맹세한 다음날 또 다른 사람이 좋아졌을 때"라는 변영주. "허접스럽게 살다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삶을 살게 된 사람의 얘기를 하고 싶다"는 그가 첫 상업영화 '밀애'로 충무로에 또 한 명의 여성감독으로 안착할수 있을지.
/박은주기자 jupe@hk.co.kr
● 원작자 전경린
영화 '밀애'의 원작은 전경린이 1999년 발표한 소설 '내 생에 꼭 하루 뿐일 특별한 날'. 여성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작가가 본 영화는 어떤 느낌일까. "영화와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거의 탈진상태다."
"영화가 소설로부터 많이 떠날수록 좋은 영화가 될 것"이라는 게 전씨의 입장. 소설이 못한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물론 소설과 영화의 차이는 크다.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신경숙의 '깊은 슬픔'이 영화화되는 것을 보면서 소설이 영화로 변주되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느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영화가 기대이상으로, 원작의 내용을 거의 빠뜨리지 않으면서 충실했다는 느낌도 든다고 했다. 물론 아쉬운 점도 많다. "어쩌면 그것이 원작을 갖고 있는 영화의 독특함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설득력이 있는 대사가 영화에서 어설픈 느낌을 주는 것에 대해 "소설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감싸는 정서를 길게 설명하는 데 반해 영화는 이 모든 작업이 생략돼 그런 느낌이 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풍경이나 음악에도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너무 꾸미면 팬시한 느낌이 들 것이고, 그런 점에서 리얼리티를 살려주는 기능을 했다"고 영화를 감싸주었다.
전씨는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벗고 영화를 보는 게 공정하다" 며 "불륜으로 삶이 끝장난 게 아니라, 다음 인생을 향해 나가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설정한 그 자체에 가치를 두고 봐달라"고 당부했다.
● 밀애
서른 살의 전업 주부 미흔(김윤진)의 행복은 남편의 불륜 상대가 집으로 찾아오면서 산산조각 난다. 6개월 후 미흔의 가족은 지방 소도시로 이사하지만, 미흔의 두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이 하찮아서 미칠 것 같은" 미흔은 사랑에 대한 집착이라고는 없는 동네 의사 인규(이종원)와 '게임'을 시작한다. 섹스는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지는 이 게임에 빠져들며 미흔은 삶의 활력을 찾지만 둘의 관계가 들통나고, 인규는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미흔은 보잘 것 없이 추락했지만 이전보다 훨씬 활기찬 모습으로 살아간다.
'밀애'는 심리의 흐름과 페미니즘적 결론을 담은 영화를 상업 멜로영화로 '차원 이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남녀 주인공의 매력이 돋보이지 않은데다, 축약과 사건화라는 영화적 내러티브 구조가 심리적 흐름을 설명하는 데는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상투적인 멜로의 주인공을 극복하기는 했지만 상업영화의 화법으로는 만족도가 뚝 떨어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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