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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3)소설가 김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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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3)소설가 김성동

입력
2002.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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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무개라는 자는 프로 기사가 되려다가 실패해서 중이 되었고, 끝내는 중도 되지 못해 결국은 소설가가 되고 말았다." 어떤 급수 낮은 하늘 밑의 벌레가 이 중생을 가리켜 한 악담이라는데, 우선은 맞는 말이다. 바둑쟁이가 되어보겠다고 입단대회에 나갔었고, 그 무엇을 찾아보겠다고 불볕의 산야(山野)를 헤매며 시주밥만 도적질하였으며, 그리고 시방은 이야기를 팔아 밥을 먹는 이른바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입단대회에 나갔던 것은 열여덟살 때였다. 그 도(道)를 깨쳐 국수(國手)가 되고자 함에서가 아니라, 다만 배가 고파서였다. 돌멩이라도 깨물어 먹고 싶고 흙이라고 파먹고 싶었으며 그리고 잠자리라도 잡아 구워먹고 싶었을 만큼 언제나 배가 고팠다. 육신의 배고픔은 그러나 두번째였고,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이 중생이 태어나서 갓 돌도 되기 전에 장총을 멘 순사한테 끌려가신 채로 상기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계신데, 외로웠던 것이다. 맨 처음 집을 나갔던 것은 고등공민학교 2학년 때였다. 오일륙이 일어났던 해 여름이었다. 열다섯 살. 대전발 영시 오십분 차를 '빠방틀어' 갔던 곳은 목포(木浦)였다. 땅의 끝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 끝의 끝에 서보고 싶었다. 끝의 끝에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것만 같았다.

기차와 마찬가지로 '빠방틀어' 타고 끝의 끝으로 가보고자 했던 외항선은 그러나 저 먼 바다의 한복판에 섬처럼 막막하게 떠 있었고, 거기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첫 절망이었다.

출가(出家)라는 이름의 그 가출(家出)은 열아홉 살 나던 해의 찔레꽃 머리였다. 졸업을 몇 달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65년. 분명하게 이 중생은 알아버렸던 것이다. 월사금을 대기 벅찼지만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떻게 또 간신히 대학을 나온다고 하더라도 공무원이 될 수 없고, 군대를 가더라도 장교가 될 수 없으며, 그리고 소위 '고등고시'에 패스를 한다고 하더라도 임관이 안된다는 것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없는 출신 성분임을 알게 된 열아홉 살짜리 소년이 꿈꾸어 볼 수 있는 길이 무엇이었겠는가. 입단대회를 통과해서 그 가진 바 실력만큼 밥을 벌 수 있는 승부사(勝負師)가 되든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진실로 진정한 '밥'을 벌 수 있다는 중이 되든지, 꾸며낸 이야기이되 진실로 진정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또한 밥을 벌 수 있는 소설가가 되는 셋 가운데의 하나일 밖에. 어린 시절 할아버지한테서 행마법(行馬法)을 배운 바둑은 그러나 그 재주가 빼어나지 못했고, 진실로 그 이름에 값하는 납자(衲子)가 되기에는 맺혀있는 것이 너무 많은 중생이었으니, 이야기를 팔아 밥을 먹게 된 것 또한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한 귀결로 된다.

문학잡지사에서 현상모집하는 신인문학상에 응모를 하기는 하였으나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이른바 '소설'이라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당최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 중생은 '학력별무'였으니까. 이 세상은 모두가 정상적인 삶의 조건 아래 태어나 정상적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정규의 과정을 거쳐 유치원과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와 대학교와 그리고 대학원을 나옴으로써 이른바 '쯩'을 소유하게 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연애를 해도 자기들끼리만 하고 혼인을 해도 자기들끼리만 하고 이층을 해도 자기들끼리만 하고 친구를 사귀어도 자기들끼리만 사귀고 세상을 씹어도 자기들끼리만 씹고 술을 마셔도 자기들끼리만 마시고 하다 못해서 불륜을 저질러도 자기들끼리만 저질러서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두고 대를 물려가며 이 세상을 지배하고 나누어 갖고 즐기게끔 조건지워져 있으니까. 그것이 이른바 기존의 질서이며 기득권일 터이니까.

시방도 마찬가지지만 그때에 이 중생은 소설책을 읽더라도 맨 먼저 작가의 약력란을 읽고는 하였는데, 하나같이 모두가 '모모하는' 대학교의 국문과와 영문과와 불문과와 독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기로 학력 같은 것을 쓰지 않고 곧바로 처음 쓰게 된 작품 이름을 쓰는 작가나 시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쓸쓸한 것이었다. 문학이라는 것이 결국은 혼자서 개척하고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고독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따로국밥처럼 문학 따로 삶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곧 삶이요 삶이 곧 문학이며, 그리하여 몸 전체를 붓 삼아서 죽을 작정으로 뚫고 나가야 하는 인생 그 자체라는 것도. 그리하여 문학이야말로 '쯩'이 없어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살아낼 수 없는 이 중생 같은 음지의 젊은 영혼들이 온몸으로 한번 달려들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도. 이 세상에는 어찌하여 '쯩'이 있는 자와 '쯩'이 없는 자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나뉘어져서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인가를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문학의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이 세상은 왜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지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로 나뉘어지고 착취하는 자와 수탈당하는 자로 나뉘어지며 세상이 즐겁다고 웃는 자와 세상이 막막하고 인생이 슬퍼서 고통스럽다고 우는 자로 나뉘어져서 끝없이 서로 물고 뜯게 되는가 하는…. 그늘의 꽃.

그래서 무엇인가를 써보았던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써서 응모해 보았던 것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데 무엇일까? 무엇인가 세상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는 이야기이겠다. 할 말이 많다는 것은 맺혀 있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겠다. 맺혀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은 세상 또는 세상 사람들한테서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이겠다. 그것도 회복 불능의 깊은 상처를. 그리하여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잘못되었으므로 뜯어고쳐야 된다는. 뜯어고쳐서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는.

응모를 했다고는 하나 이 많이 모자라는 중생의 작품이 '쯩'이 있는 숱한 응모작들과 겨루어 당선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선이 된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백만원이라는 상금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상금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없었으므로 생계의 대책이 없었다. 소설을 쓰는 석 달 동안을 국수와 라면쪼가리로 연명하였으므로 당장의 끼니가 골칫거리였다. 78년 여름이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깊어 있었다.

연꽃은 그만두고 호박꽃 한 송이 피워보지 못한 채 진흙창, 사바의 똥바다로 다시 내려오게 된 것은 76년 늦가을이었다. 그 전 해에 활자로 찍혀진 바 있던 단편소설 '목탁조(木鐸鳥)'가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만들지도 않았던 '중쯩'을 빼았겼던 것이다. 만들지도 않았던 '쯩'을 빼앗겼기 때문에 다시 흙바람 부는 저자로 내려왔다고 했지만 진실로 이 중생을 못 견디게 만들었던 것은 만들고 싶지도 않았던 '쯩' 따위가 아니었다. 공밥을 먹고 있다는 죄스러움. 내 손으로 내 밥을 벌고 싶었다. 내 손으로 번 밥으로 늙으신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싶었다.

인연의 수레바퀴는 참으로 묘해서 다시 바둑으로 밥을 먹었던 적도 있었다. 바둑 잡지에서 밥을 벌었던 것과 '석남거사(石南居士)'라는 필명으로 일간지에 관전기를 썼던 것이 그것인데, 한 수 한 수가 그대로 승부와 직결되는 중반싸움의 한복판에서 포석(布石) 시절을 떠올려 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지난 겨울 이곳에 왔을 때의 심정을 적어보았다.

천지를 삼킬 듯 눈은 내리고 개울물은 꽝꽝 얼어붙었다

배는 고프고 목은 타는데 눈보라는 또 휘몰아친다

나는 왜 또 이 산 속으로 왔나 물통은 또 어디 있나

도끼로 짱짱 얼음장 깨면 퍼들껑 멧새 한 마리

천지를 삼킬 듯 눈은 내리는데 나한테는 般若(반야)가 없다

없는 般若(반야)가 올 리 없으니 燔惱(번뇌)를 나눌 동무도 없다

산 속으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평안도 시인은 말했지만 내겐 버릴 세상도 없다

한 번도 정식으로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그립다

배고픈 것보다 무서운 건 외로움이고 외로움보다 더 무서운 건 그리움이다

● 연보

1947년 충남 보령 출생 1965년 서라벌고교 3학년 때 출가, 1976년 하산 1975년 '주간종교'에 단편 '목탁조' 당선, 불교계를 비방 했다는 이유로 등록하지도 않았던 승적에서 제적당함 1978년 중편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등단 장편 '만다라' '집' '길' '국수(國手)' 소설집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산문집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 '생명기행' 등 신동엽창작기금(1985) 행원문화상(1998) 현대불교문학상(2001)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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