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이 온통 대권 다툼에 빠져 있던 그 무렵 나도 대통령 선거 출마 여부로 고심했다. 40년 가까이 정치를 해 오면서 언젠가는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리라는 꿈을 간직해 온 터였다.그러나 나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하늘의 뜻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후보가 되는 과정 역시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이전의 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 박사처럼 거당적 추대로 국민 앞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던 중 1997년 3월10일 병석에 계시던 어머님께서 운명하셨다. 대구에서 어머님을 묻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나는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해서 부르면 몰라도 내가 직접 나서서 후배들과 다툼을 벌이지는 않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후보 경선을 20일 앞둔 7월1일 오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의원회관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 의장이 대표를 맡아 경선을 이끌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미 당은 당대로, 후보들은 후보들대로 갈등의 골이 깊어진 상태에서 혼탁하고 골치 아픈 경선 관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다른 사람을 시키시죠. 민주계 원로인 김명윤(金命潤) 의원을 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김 대통령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다시 부탁했다. "모든 후보들이 이 의장이 대표를 맡아야 공정하게 경선을 치를 수 있다고 하니 그러지 말고 내일 국회 대표연설부터 준비해 주시죠." 김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에 마지못해 수락했다. 여당 사상 최초의 후보 경선을 맡아 달라는데 이를 무작정 뿌리치는 것은 당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7월5일 후보자간 합동연설회가 수원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전국 16개 시도별로 열린 합동연설회는 괴문서, 금전 살포 시비 등 일부 잡음은 있었지만 여당의 민주적 경선 과정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한국 민주주의사에 한 획을 그었다.
마침내 7월21일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선출대회가 열렸다. 1차 투표 결과 4,955표를 얻은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1,774표에 그친 이인제(李仁濟) 후보를 크게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이한동(李漢東) 후보 1,766표, 김덕룡(金德龍) 후보 1,673표, 이수성(李壽成) 후보 1,645표, 최병렬(崔秉烈) 후보 236표 등의 순이었다. 어느 후보도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 2위 후보간의 결선투표가 실시돼 이회창 후보가 60%인 6,922표를 획득, 4,622표를 얻은 이인제 후보를 제치고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당일로 이회창 후보에게 대표 자리를 넘기고 집으로 돌아 오면서 나는 그제서야 피로를 느꼈다. 길고 긴 20일이었다. 모든 사람의 눈길이 선출된 후보에게 쏠리고 내가 겪은 고초는 묻히고 말았다.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이득이 없는 일을 맡아 최선을 다했고, 경선을 성공적으로 끝낸 것으로 만족했다. 나중에 "이만섭 의장이니까 7명이나 되는 대선 주자들을 이끌고 경선을 제대로 치렀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경선 자체가 파국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래도 가슴 한 구석이 뿌듯했다.
경선 당시 나는 대표로서 1주일에 한 번씩 김 대통령과 주례 회동을 했다. 나는 청와대에 갈 때마다 후계 구도에 대한 김 대통령의 분명한 의중을 알고 싶어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나한테는 터놓고 얘기해 주셔야지요. 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김 대통령은 굳게 입을 다물어 끝내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내 느낌에 당시 김 대통령은 극심한 정신적 허탈 상태에 있었다. 한보 사태를 계기로 측근들의 온갖 비리가 드러나 문민정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데다 아들마저 비리 혐의로 구속돼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내 기억으로는 당시 김 대통령은 대권 구도를 두고 누구를 밀고 말고 할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모든 게 귀찮은 심리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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