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그 자체보다 이후의 국정운영이 더 중요하다. 적어도 국민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누가 당선되든지, 국정운영에 국민의 생각과 이익이 반영되는 것이 중요하다. 국민의 눈에, 국정운영은 민생에 직결된 '국민, 우리의 일'이지만 선거는 '정치인, 그들만의 일'로 비친다.이런 국민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는 정치인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정치인은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을 보인다. 선거전에서 승리하는 데 모든 것을 걸고 자신들이 짊어져야 할 국정의 방향과 운영에는 별 관심이 없다. 마치 선거에서 지면 세상의 종말이 오는 듯 사생결단의 대결을 벌인다. 그 선거 대결이 정책현안을 둘러싼 것이라면 정치인들이 국민이익을 염두에 두고 그 실현을 위한 방법상의 차이로 다툰다는 변(辯)이 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생현안과 무관한 각종 설(說)과 의혹을 제기하며 이전투구를 벌이고, 정견과 상관없이 전술적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선거전에서의 승리에만 매달리는 데 사안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보면 정치인이 선거지상주의에 빠질 만도 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당선만 되면 선거운동 때 저지른 각종 편법과 불법은 물론, 자신들의 비도덕적 행태마저 묻혀 버린다.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측은 엄청난 권력의 맛을 아무런 견제 없이 누리게 된다. 각종 정부 산하기관장까지 수많은 자리를 독식할 수 있다. 반면 패한 측은 정치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최악의 경우 권력기관을 통한 압력과 회유로 인해 자체 조직기반마저 와해되기도 한다.
승자 독식이라는 현실만으로 편협한 선거지상주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미국의 경우가 그 시사점을 제공한다. 미국에서도 승자 독식의 원칙은 여전하다. 상원이든 하원이든 1석이라도 많은 정당이 모든 상임위원장직을 독식한다. 2000년 선거의 결과로 상원 의석분포가 50 대 50이 되었을 때, 상원의장인 부통령이 공화당원이란 이유로 상원의 모든 위원장직을 공화당이 점거했다. 몇 달 후 공화당원이던 제포즈 상원의원이 탈당해 무소속이 되자 민주당 의석이 1석 더 많게 되어 모든 위원장직이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상황이므로 미국 정치인의 선거집착도 대단하다. 얼마 전 미네소타의 민주당 상원의원 웰스턴이 선거를 열흘정도 앞두고 항공기 사고로 사망하자, 다수당을 유지하기 위해 1석이 아쉬운 민주당이 전직 부통령이자 대선후보였던 76세의 먼데일에게 보궐선거 출마를 종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미국 정치인의 선거집착은 국민 눈치를 보며 한 표라도 더 얻으려는 강박관념으로서, 국민을 무시한 채 진행되는 우리의 선거지상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미국의 정치인은 표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서라도 선거기간에 국정운영을 방치하지 않는다. 선거대결은 주로 정견논쟁으로 진행되는 덕택에 향후 국정운영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선거에서 이기려는 정치인의 집착은 결국 국민을 위한 국정운영을 제고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태양은 떠오른다. 미국의 경우 선거 패배자도 당선자나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치열한 선거 대결이 국정운영을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국정방향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결국 최종 승자를 판가름한다.
우리라고 잘못된 '선거 지상주의병(病)'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규칙상 승자독식을 견제하는 합의적 요소들이 많고, 문화가치관에서도 평등주의적 전통이 뿌리깊다. 이런 기존의 규칙과 문화전통을 정치인들이 지키면 된다. 치열한 정견대결을 폄으로써 향후 국정수행의 궤도를 설정하고, 승자와 패자가 서로 견제하고 협조하며 국정을 수행하는 모습이 절실히 요구된다. '선거 후에도 해는 떠오른다'는 인식을 한국의 정치인들이 잊지 않을 때 국민이 주인 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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