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머금은 듯 촉촉한 눈, 기름을 발라 한 올도 빠짐없이 뒤로 빗어 넘긴 머리, 파란 색 죄수복과 고급스런 영국식 말투. 지적 살인자로 앤서니 홉킨스를 능가할 배우가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하는 살인자 한니발 렉터는 지적인 카리스마와 교양과 품위를 갖춘 지적 살인마의 전범이다.'양들의 침묵' '한니발'의 전편인 '레드 드래곤(Red Dragon)'은 이미 1986년 마이클 만 감독이 '맨 헌터'라는 이름으로 영화로 만들었다.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리메이크가 된 것은 당시 주연이었던 한니발 역의 브라이언 콕스, FBI 수사관 역의 윌리엄 페터슨을 대체할 만한 강력한 두 스타를 만났기 때문. 한니발 역에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앤서니 홉킨스와 FBI 요원 윌 그래엄 역의 에드워드 노튼은 팽팽한 적수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과 긴장을 충실히 표현해냈다.
우아한 클래식 연주회. 그러나 수준미달의 플루트 주자는 귀가 밝은 렉터(앤서니 홉킨스)의 귀를 어지럽힌다. 연주회가 끝난 후 단원들은 렉터의 성찬에 초대 받아 실종된 플루트 주자 이야기를 하며 맛있는 요리를 즐긴다. "재료를 알면 먹지 못할 것"이라며 야릇한 미소를 흘리는 렉터. 송장을 식재료로 삼아온 렉터의 꼬리를 잡은 것은 FBI 수사관 윌 그래엄(에드워드 노튼). 그를 잡은 그래엄은 영웅이 됐지만 중상을 입고 요원직에서 물러나 플로리다 휴양지에서 선박을 수리하며 살아간다. 도입부의 긴박감이 꽤 매력적이다.
7년 후, 연쇄살인극이 벌어지며 그래엄은 결국 FBI에 복직한다. 그는 잔혹한 연쇄 살인범의 심리 분석을 렉터에게 의뢰, 한 때 서로 죽이고 죽을 뻔한 두 사람은 다시 조우한다.
직관이 발달한 탁월한 요원 역의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도 꽤 매력적이지만, 역시 '레드 드래곤'을 끌고 가는 힘은 앤서니 홉킨스에게 있다. 윌의 조력자이면서도 언제 돌변할 지 모르는 법의학자이자 살인마인 렉터. 비록 철창 대신 두꺼운 유리창에 갇혔으나 언제라도 밖으로 튀어나와 귀를 물어 먹을 것 같은 렉터 박사의 카리스마와 위협적인 느낌은 영화에 흠뻑 빠지게 하는 제1 요소이다. 고독과 소외가 가장 친한 벗일 것 같은 연쇄 살인마 프랜시스 돌하이드로 나온 랄프 파인스의 연기력 또한 인색하게 평가할 수 없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 '순결의 징조'와 연쇄 살인마의 정신병을 연결시킨 발상은 고급스럽지만 살인 단서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꽤 단순하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이 묵직한 단조 분위기였다면 '레드 드래곤'은 그동안의 렉터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어쩌면 '컬트 코미디'로 보일 지도 모를 일이다. 긴장의 순간, 씩 웃는 렉터의 모습이나 엉터리 기사를 쓴 기자를 고문하는 대목에서는 긴장보다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 긴장의 반복이 반드시 긴장을 고조하는 것만은 아니다. 마지막 대목 "예쁜 FBI 요원이 찾아왔다"며 '양들의 침묵'을 암시하는 대목 역시 웃음을 참기 힘들다. 긴장으로 시작해 유머로 끝나는 스릴러. 감독은 '러시아워'의 브렛 래트너. 7일 개봉. 15세 관람가.
/박은주기자 jup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