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에나 젊은이들이 자신을 쏟아 붓는 것들이 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나이, 나름대로 현실에 대해 반응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반응이 기성에 반하는 것일수록 또래의 젊은이들은 열광하며 세대 간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1977년 '아니 벌써'라는 희한한 노래를 들고 나온 산울림이 바로 그랬다.산울림은 김창완(48) 창훈(46) 창익(44) 형제가 71년부터 시작한 아마추어 밴드. 둘째 창훈이 대학에 들어간 74년부터 드럼 세트 등 제법 밴드 형식을 갖추었고 77년 제1회 대학가요제에는 무이라는 이름으로 '문좀 열어줘'를 출품, 본선에 들었으나 김창완이 졸업생이어서 실격했다.
대신 서울대 농대 샌드 페블스 출신이었던 창훈이 형 창완과 만든 '나 어떡해'가 대상을 수상했다. "어, 우리 노래가 대중성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서 기념 음반을 만들기로 했죠. 마지막으로요." 김창완의 회고다.
데뷔곡 '아니 벌써'는 대단히 이색적인 노래로 받아들여졌다. 아니 벌써라는 노랫말도 그랬지만, 가수가 아닌 것 같은 솔직한 보컬, 아마추어의 느낌을 간직하면서도 기존의 프로 밴드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던 무언가가 있었다.
음반은 대히트했고 삼형제는 '어쩔수 없이' 직업 가수로 나섰다. 이듬해 발표한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역시 대박이 났고 81년에는 창훈과 창익이 제대 후 만든 7집 '가지마오'도 인기를 얻었다. 그 사이에 '동요음반' '개구장이'와 '산할아버지'도 빅 히트했다. "너무 상업적인 음악을 하는 게 아니냐는 자기반성에서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듣더니 대번 동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요음반이 됐어요." 원치 않던 상업적 성공은 '어린왕자' 등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던 당시 상황의 덕이 컸다.
산울림은 한국의 록 역사에서 분명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음악적으로는 음악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를 새롭게 했다. "우리는 슬프면 우는 게 먼저고 음악은 나중이라는 식이었죠." 거칠지만 원초적인 감정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었다. 단어마다 내재된 선율이 있다고 보고 생각과 느낌을 노랫말로 다 써놓은 다음 그것을 멜로디로 풀어내는 것도 형제들만의 독특한 음악적 문법이었다.
음악 외적으로도 남긴 바가 크다. 산울림은 록이 젊은이들의 음악이라는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일깨워 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음악은 모범생들이라면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죠. 우리는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일탈행위에서 해방감과 즐거움을 느꼈어요. 어른들이 설명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해법을 나름대로 구하면서요. 특히 록은 큰 소리에 대한 동경을 채워주었죠"라는 김창완의 설명은 꽤 설득력이 있다. 그런 그들의 음악은 마치 60년대 미국에서 아마추어 록 밴드 붐이 일었던 것처럼 또래의 젊은이들에게도 해방감을 안겨 주었다.
"세상에 없는 일을 해보자 했던" 산울림. 삼형제 중 김창완만이 78년부터 80년 방송통폐합 때 잠깐쉬었을 뿐 22년째 계속 중인 DJ와 연기자로 연예계를 떠나지 않고 있다. 두 동생은 캐나다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내년쯤 한번 뭉쳐 음반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김지영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