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 반군에 의한 모스크바 인질극 사태가 120명 가까운 인질이 숨지는 대형 참극으로 끝난 직접적 원인이 진압 작전에 사용된 독가스 때문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다. 러시아 당국이 가스의 정체에 대한 발표를 미루는 가운데 인질범과 인질이 섞여 있는 공간에 치명적인 화학가스를 사용한 진압 방법에 대한 국내외의 비난도 잇따르고 있다.▶희생자 급증은 독가스 때문
러시아 보건당국은 27일 "1명을 제외한 인질 사망자 전원이 독가스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병원에 입원 중인 195명이 위독한 상태"라고 밝혔다. 러시아 정부는 진압 작전 종료 후 30명으로 발표한 인질 사망 규모를 7시간 뒤 67명, 하루 뒤 90명 등으로 계속 늘려 가스 질식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켰다. 27일 사망한 네덜란드인 1명을 포함한 4명의 외국인 인질 희생자의 사인도 독가스 노출로 드러난 가운데 위독한 상태로 알려진 인질 수를 감안하면 사망자는 300명을 넘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인질의 사망 원인에 대해 당초 러시아 당국은 진압 과정의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가스의 정체
진압 직후 '수면 가스'를 사용했다고 발표한 러시아 당국은 논란이 증폭되자 '특수 가스'로 용어를 수정했지만 정확한 가스의 종류는 공개하지 않았다. 논란이 일자 모스크바 병원당국자는 "가스에는 일반적 마취에 쓰이는 향정신성 물질이 포함됐다"며 "높은 농도로 쓰일 경우 의식 불명, 호흡곤란 등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고 밝혔다.
외신들은 독극물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특수부대가 사용한 독가스는 발륨 등 강력 진정제가 포함된 압축가스나 BZ 가스와 같은 무능화 작용가스 같다고 보도했다. 높은 농도의 무능화 작용제에 노출될 경우 인체는 수면과 환각 증세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행동불능에 빠진다. 실제로 많은 인질범들과 인질들은 진압군이 극장 안에 들어갔을 때 구토의 흔적과 함께 마치 잠을 자는 듯 조용히 누워있었다. 전문가들은 인질 구출 작전과 함께 바로 의료진이 현장에 들어갔더라면 응급 조치를 취해 사망자가 줄어들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마취 전문가 요엘 돈친 교수는 "환자들의 상태와 인공호흡이 필요했다는 증언으로 보아 신경가스가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사람을 한순간에 무력화할 수 있는 수면가스나 마취제는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27일 사용된 독가스가 화학무기금지협약(CWC)이 금지한 위험 가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해 논란을 증폭시켰다. 전문가들은 러시아 당국이 구 소련 치하에 개발했던 가스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국제 인권단체인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러시아 당국에 사용한 가스의 정체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고 BBC방송이 보도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도 러시아 정부에 독가스의 정체를 알려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불가피한 선택인가
러시아 정부는 가스 사용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더 큰 희생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강조했다. 인질범들이 자폭용 폭탄을 몸에 두르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일시에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독가스 사용이 유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질극 진압에서 인질과 인질범 구별없이 치명적 가스를 사용한 것은 유례가 드물다는 지적이다. 러시아 정보당국 관계자는 "화학 합성물로 이뤄진 가스가 사전 대책 차원에서 살포됐으나 예상보다 농도가 높았다"며 "그렇게 강력한 효과를 낼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독가스 살포 순간 한 여성 인질은 휴대전화를 통해 "제발 우리를 질식시키지 마세요. 쿠르스크호(2000년 8월 어뢰 폭발로 인한 유독가스 발생으로 승무원 118명 전원이 숨진 러시아 핵추진 잠수함)처럼 되기는 싫어요"라고 외친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가디언은 27일 "가스 사용으로 구출작전이 학살극으로 변했다"고 보도했다.
/배연해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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