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측은 23일과 24일 연 이틀에 걸쳐 2개의 여론조사 결과를 '슬그머니' 내놓았다. 공식 발표없이 그냥 여론조사 결과를 기자실에 돌리기만 한 것은 두 조사 모두 자체 의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3일의 여론조사 결과는 여론조사기관 폴앤폴이 19일 실시한 것으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 32.2%, 정몽준(鄭夢準) 의원 27.9%, 노 후보 23.0%로 나타나 있다. 24일 더 쉬쉬하며 내놓은 것은 뜻밖에도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가 실시한 조사 결과였다. 내용은 이 후보 33%, 정 의원 27.5%, 노 후보 24.2%. 노 후보가 20%를 훌쩍 넘겨 정 의원을 3.3%포인트 차로 맹추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 후보측은 한나라당 조사여서 "더 믿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민주당에서 한나라당 자체조사 결과가 회람되고 있던 바로 그 시간대. 정 의원의 국민통합 21에선 정광철(鄭光哲) 공보특보가 마이크를 잡았다. 정 특보는 부산일보 등 6개 지방신문사가 한길리서치에 의뢰한 또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22∼23일 실시된 이 조사에서 이 후보는 33.0%, 정 의원 27.4%, 노 후보 18.5%였다. 정 특보는 "노 후보가 20%를 넘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굳이 마이크를 잡았던 것.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의 조사는 정 의원을 하향평준화해 3자 구도에서 정 의원과 노 후보를 2중(中)으로 묶어두겠다는 의도"라는 볼멘 소리도 터져 나왔다. '조작'혐의가 짙다는 주장이다.
■"15%이하면 재앙적 상황"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노 후보측과 정 의원측의 신경전은 이처럼 점입가경이다. 10월 중순 이후 반창(反昌) 비노(非盧) 성격의 4자연대 추진 및 무산, 김민석(金民錫) 전 의원의 국민통합 21 합류, 북한 핵 문제 증폭 등의 사건이 이어지면서 두 후보 진영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 보름여를 되짚어 보면 여론의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각 후보 진영의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민주당에선 사실 15, 16일까지만 해도 노 후보의 지지율 하락을 저지할 묘책을 찾지 못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민주당 선대위의 한 핵심 관계자가 "15% 이하로 내려가는 재앙적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17일 오전 김민석 전 의원이 전격적으로 민주당을 탈당, 국민통합 21 합류를 선언했다. 노 후보 진영에서는 이 사건이 여론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미처 예측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김 전 의원에 대한 비난과 함께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정 의원이 개혁 명분마저 가져 가는구나"하는 낙담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네티즌들의 비난 여론이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적어도 인터넷 상에서는 김 전 의원의 탈당이 오히려 노 후보측에 호재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노 후보측은 즉각 이러한 비난 여론의 확대 재생산에 들어가는 한편 비난의 물줄기를 노 후보를 위한 모금 운동에 연결시켰다. 김 전 의원과 같은 386 학생운동권 출신인 임종석(任鍾晳) 의원 등이 앞장섰다. 인터넷상의 신용카드 결제, 휴대폰을 이용한 기부 등으로 하루 1억원 이상이 모금되기도 하는 등 예기치 못한 성과를 거두자 노 후보측은 더욱더 고무됐다. 노 후보는 이러한 네티즌을 '반란군'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때마침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이 20일 여론조사를 실시, 21일자 지면에 그 결과를 보도했다.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 조사는 이 후보 32.9%, 정 의원 29.6%, 노 후보 17.9%였고 조선일보―갤럽 조사는 이 후보 33.4%, 정 의원 27.0%, 노 후보 17.1%였다. 한국일보 조사에서는 정 의원이 한 달 가량 전인 9월23일 실시된 조사에서와 똑같은 지지율을 얻은 반면 노 후보는 2%포인트 올라갔다. 노 후보가 상대적으로 상승한 셈이다. 조선일보 조사에서는 정 의원이 9월30일 조사보다 2%포인트 내려갔고 노 후보는 0.9%포인트 떨어졌다. 노 후보의 하락 폭이 상대적으로 작다. 노 후보측은 정 의원의 하락 조짐에 반색하면서 20% 돌파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갔다. 이러한 결과에 영향을 받은 듯 민주당내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의 활동이 지지부진해진 것도 노 후보 진영을 더욱 고무시켰다.
■시소현상은 호남민심이 주도
정 의원의 지지율이 올라가면 노 후보가 떨어지고 노 후보가 상승 기미를 보이면 정 의원이 하락 조짐을 보이는 '시소 현상'은 호남 민심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2위 다툼의 핵심은 호남표의 향배에 있다는 얘기다.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의 9월23일 조사와 10월20일 조사를 비교해보면 호남 지역의 부동층이 줄어들면서 노 후보의 이 지역 지지율이 30.1%에서 47.5%로 17.4%포인트나 상승했다. 반면 정 의원은 36.8%에서 31.4%로 5.4%포인트 떨어졌다. 노 후보 진영은 영남표의 결집 현상을 우려, 이 같은 흐름의 부각을 꺼리고 있으나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호남 표'의 이탈이 중단됐다는 점은 인정한다. 호남 민심이 노 후보로 복귀하고 있다는 주장은 정 의원을 대안으로 여기던 분위기가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과 맞물려 있다.
정 의원과 노 후보가 모두 강점을 보이고 있는 '반(反) 이회창(李會昌)'성격의 20∼30대 젊은 층과 개혁 성향 표의 흐름도 관심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이들의 표심도 정치적 현안이나 상황에 따라 노 후보와 정 의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김민석 역풍 및 대북 정책에서의 정 의원의 강경 선회 등으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노사모)'로 상징되는 이념지향적 젊은 층은 더 단단히 뭉치고 있고, '붉은 악마'로 상징되는 감성적 표심의 정 의원 지지는 느슨해지는 것 같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 의원 진영 내부에서 "정 의원 지지층은 순두부 같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전체적 지지율 추이와 관련, "노 후보나 정 의원의 전체 지지율은 모두 오차 범위내여서 통계적으로 의미있는 변화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다만 그들 특유의 '감'으로 보면 정 의원의 지지율이 다소 하락 기미를 보인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언론보도가 하락 부채질"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감안하면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정 의원측이 초기에 보인 반응도 이해할 만하다. 정 의원측은 21일까지만 해도 "지지율은 조금 오르내리는 것 아니냐 "며 지지율이 주춤한 현상을 일시적인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22, 23일 일부 언론에서 '정 의원 지지율 주춤, 4자 연대 무산' 등의 기사가 계속 실리면서 정 의원 진영이 위기인 것처럼 보도하자 "언론 보도가 하락 현상을 부채질할 수 있다"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비판적 기사가 많아지자 24일엔 "첫 고비이면서 최대 위기"라는 말도 흘러 나왔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김광덕기자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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