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는 생명현상의 비밀을 푸는 만능 열쇠인가. 천재성은 물론 롱다리와 비만 등도 예측할 수 있다며 대중을 현혹하는 신종 DNA검사, 생명공학 연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놓고 팽팽히 맞서는 사회적 갈등은 유전자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유전자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생물학자들조차 의견이 분분하다면?
25일 서울 세브란스빌딩에서 열린 '유전체연구와 커뮤니케이션'세미나에서 장대익(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과정·사진)씨는 "유전학, 발생학, 분자생물학, 진화생물학의 학자들조차 유전자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견해차가 매우 크다"며 "유전자를 만능으로 보는 시각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흔히 통용되는 유전자 개념은 '단백질을 생성하도록 암호화한 DNA 단편'이다. 유전자는 RNA를 통해 단백질을 만들고, 단백질은 개체 발생부터 먹고 움직이고 사고하는 모든 생명현상을 조절하기 때문에, 유전자는 곧 기형과 질병 극복의 열쇠로 여겨져 왔다. 생물학자들은 유전자라는 '성배(聖杯)'를 찾아 게놈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최근엔 신의 영역을 침범할 정도로 성과를 올려 윤리성 논란을 빚기도 했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 같은 진화생물학자는 유전자를 진화에 유리한 차이(키가 크거나 빨리 달리는 등)를 만드는 '진화의 단위'로 보기 때문에 유전자에 특권을 부여한다. 이런 견해는 대중에게 유전자가 천재성이나 게으름까지 좌우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퍼뜨리는데 한몫을 한다.
그러나 세포 속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발생학자들은 생쥐의 태아에서 근육 형성에 관여하는 MyoD 유전자를 제거한 실험에서 다른 유전자인 Myf5가 MyoD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을 발견했다. 발생 초기 배아의 일부를 제거해도 정상적으로 발생하는 사례는 많다. 때문에 일부 발생학자들은 "DNA는 개체 발생에서 하나의 자원일 뿐이며 발생에는 세포 내 소기관, DNA메틸화, 세포질의 화학농도, 세포막 등이 동등하게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과 발현(기능)하는 것은 별개라는 점도 혼란을 일으킨다. 일부 치사(致死) 유전자를 제외하면 세포 속 대부분의 유전자는 조용히 이중나선구조 속에 접혀있다가 특정한 조건에서 특정 유전자만 기능을 한다. B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모두 간염을 앓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유전자를 잠에서 깨우는 조건은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비만·천재성·롱다리 DNA 검사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설사 이런 유전자가 있다 해도 꼭 표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대익씨는 '진화론적 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을 유전자의 진실을 밝힐 유력한 학문으로 꼽는다. "진화론적 발생생물학은 결정적 역할을 하는 유전자와 대체 가능한 유전자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토론자로 참석한 이상욱(한양대 철학과) 교수는 "전문가들은 유전자가 절대적이지 않고 확률적이라는 공감대는 갖고 있다. 다만 방법론이나 연구비 배분문제와 얽혀 첨예한 입장차리를 보이는 것"이라며 "그러나 일반 대중과 전문가 사이의 논쟁을 생산적으로 이끌기 위해선 유전자의 기본개념을 짚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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