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들의 싸움'으로 신한국당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고 여당이 시끄럽다 보니 정국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은 1996년 8월 마침내 9룡 모두를 향해 경고성 메시지를 던졌다. "독불장군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경고도 과열된 대권 경쟁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나는 그때 당의 상임고문으로서, 그리고 국회의장을 지낸 정계 원로로서 깊은 걱정에 잠겼다. 정치인에게 욕심이 없을 수는 없다. 누구나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올라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펼쳐 보려는 꿈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경제 사정이 눈에 띄게 어려워져 가는 상황에서 열 명에 가까운 대권 주자들이 오로지 소모적 정쟁에만 매달려 있으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런 조기 과열 경쟁은 집권여당으로서 정권 재창출을 하는 데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당시 나도 대권 도전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대권 다툼에는 발을 들여 놓고 싶지 않았다.
대권 놀음으로 여당이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나라 살림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나라 경제 곳곳에서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96년 말 외채가 1,000억달러에 달했고 그 가운데 59%가 1년 안에 갚아야 할 단기 외채였다. 금융실명제의 시행으로 중소기업은 갑자기 어음할인이 되지 않아 자금난에 허덕였다. 그런데다 국민의 저축률은 땅에 떨어졌으며 과소비가 만연해 있었다. 너도 나도 해외여행이다, 자동차다, 외제사치품이다 하며 거품경제의 극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96년 12월 26일의 추운 겨울 새벽 정부 여당의 무리수가 나왔다.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전격 날치기 통과시킨 것이다. 정부 여당의 노동법 개정안은 '복수노조 허용'과 '정리해고'를 골자로 한 것이었는데 노·사 어느 쪽의 환영도 받지 못했다.
당시 정부와 노사 양측은 원만한 타협을 위해 계속 협상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야당의 김대중(金大中) 총재도 "1월 15일까지는 야당안을 내놓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인내를 갖고 노력한다면 적어도 타협이 가능했는데 그 사이를 못 참아 화를 부른 것이었다.
그 날 새벽 나는 동료 의원들과 국회 근처 호텔에 있었다. 당 지도부는 의원들을 몇 그룹으로 나눠 몇몇 장소에 대기시켰다. 날치기를 위한 준비였다. 야당은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호텔 앞으로 버스가 왔다. 버스는 국회 의사당으로 들어갔다.
노동법은 절대 무리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당 고문회의 등을 통해 누누이 강조했던 나는 "끝내 내 말을 듣지 않고 이렇게 하는구나"하는 답답한 마음이었다. 본회의장에 들어가기는 하되 날치기를 시도하면 곧바로 퇴장하리라 마음 먹었다. 천천히 맨 마지막으로 회의장에 들어가니 이미 "이의 없습니까?"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회자가 방망이를 두들기고 있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나는 자리에도 앉지 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의원들이 한두 명씩 본회의장을 빠져 나왔다. 이홍구(李洪九) 대표가 내게 다가 오더니 "그래도 잘 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야당과의 몸싸움 없이 처리를 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요, 국민에게 부끄럽지 않소"하고 쏘아 붙이고는 본회의장을 나와 버렸다.
여의도의 겨울 바람은 매서웠다. 의사당 밖에 나서자 볼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슴 속은 "이제 정말 문민정부가 끝장이 나겠구나"하는 생각으로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이날의 노동법 날치기 처리는 임기 후반 김 대통령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이때부터 문민정부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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