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러 인질극 장기화 조짐/외국인 75명 석방약속 불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러 인질극 장기화 조짐/외국인 75명 석방약속 불발

입력
2002.10.26 00:00
0 0

러시아 모스크바 문화센터극장 인질 사건 3일째인 25일 체첸 반군들이 러시아 정부군의 체첸 철수라는 요구 조건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다음날부터 인질들을 사살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나서 사태가 급속으로 악화할 조짐이다. 앞서 이들은 인질 700여 명 중 외국인 75명의 석방을 약속했다가 번복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 관측통들은 사태의 장기화를 우려하고 있으며 인질들은 반군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하고 나서 러시아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살해 위협, 협상 난항

이 극장의 대변인은 이날 인질로 억류된 한 배우에게서 들었다며 "반군들은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26일 새벽부터 인질들을 죽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말했다. 인질범들은 당초 요구 조건 수용 시한으로 7일을 제시했었다.

반군들은 또 러시아 국가 두마 의원 등과 협상을 통해 이날 오전 17개국 외국인 인질 75명을 석방키로 했으나 돌연 이를 번복했다. 합의 당시 인질범들은 "체첸과 싸우지 않는 나라들의 국민들은 풀어주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번 습격은 러시아 밖 테러리스트들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 것"이라며 사건을 대 테러 전쟁 차원에서 다룰 것임을 시사해 협상의 여지를 크게 줄였다.

관측통들은 인질 숫자가 워낙 많아 러시아 특공대 오몬과 알파가 쉽사리 행동을 개시할 수 없는데다 인질범들이 1주일 내에 체첸에서 러시아군이 철수하라고 요구하고 있어 사태가 금세 끝나기 힘들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정치적 부담을 떠안은 푸틴 대통령이 극적인 사태 해결을 시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국장은 "인질을 석방하면 인질범들의 목숨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질 일부 석방, 음식물 반입

반군들이 당초 약속한 석방 대상 외국인은 미국인 4명, 영국인 3명, 독일인 7명, 네덜란드인 2명, 호주인 2명, 우크라이나인 23명, 터키인 3명 등으로 전해졌다. 이들의 석방은 일단 무산됐지만 반군들은 이날 정오께 6∼12세의 어린이 인질 8명을 풀어주었고 이에 앞서 오전 일찍 7명의 러시아 남녀도 석방했다. 오후에는 그동안 반입을 불허했던 물과 음식도 들여오도록 허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인질 스톡홀름 신드롬

일부 인질들이 게릴라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스톡홀름 신드롬'(인질이 범인에게 자진 협력해 그 행위를 지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인질들은 친지에게 전화해 반전 데모를 요청했고 "러시아 지도자가 무력 사용 없이 상황을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을 직접 언론에 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후 100여명의 시위자들이 극장 주변에서 반전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인질들의 상황은 이날 일찍 극장에 들어가도록 허용된 러시아 NTV 취재진을 통해 러시아 전역으로 생방송됐다. NTV는 극장 주방 구역에서 자동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복면을 한 반군들의 모습과 이슬람 전통 복장을 한 여성 반군이 온몸에 폭발물을 두른 모습을 생생히 방영했다. 한편 러시아 당국은 인질범들의 요구나 인질의 말이 그대로 방송되는 것은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러시아 메아리 방송 등 일부 방송사를 폐쇄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모스크바 외신=종합

■평행선 대치… 참사 배제못해

700여 명의 관객을 볼모로 한 체첸 반군의 인질극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비극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체첸 반군들이 내건 러시아군 즉각 철수는 러시아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항이다. 결사 항전과 강경 진압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맞부딪칠 경우 이번 인질극은 사상 최악의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인질사태 수습을 위해 국제적인 외교 노력이 집중되고 있고 러시아 정부도 타협 의사를 내비치고 있어 평화적인 해결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인질극을 둘러싸고 체첸 반군과 러시아는 피로 얼룩진 악연을 거듭해 왔다. 체첸 반군은 기회 있을 때마다 무차별적인 인질극을 벌여왔고 이에 개의치 않고 러시아는 강경 진압으로 일관해 대규모의 사상자를 냈다. 러시아는 1995년 6월 체첸 공화국 변경지역의 한 병원에서 1,000여 명을 인질로 잡고 저항하는 체첸반군을 강제로 진압, 10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체첸 반군은 96년 1월 러시아 남부 키즐야르의 한 병원을 습격해 수백명의 민간인 인질을 인간방패로 내세워 러시아군 철수를 요구했다. 이때도 러시아군은 78명의 희생을 치르면서 반군을 진압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번 인질 사태를 종전처럼 힘으로 밀어붙이기는 힘든 상황이다. 자살특공대임을 자칭하는 인질범들이 곳곳에 폭탄을 장치해 놓은데다 모스크바 시민은 물론이고 외국인도 상당수 포함돼 있어 섣부른 진압작전으로 대규모 희생자를 낼 경우 안팎의 비난을 감수해야 할 처지다.

이에 따라 러시아 당국자들은 인질범들에게 인질을 무사히 석방하면 안전한 탈출로를 보장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등 평화적 해결 의지를 보이고 있다. 체첸 반군으로서도 이번 인질극 사태를 통해 자치독립을 위해 싸우는 체첸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떠올렸다는 점에서 협상 테이블에 나설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인질범 절반이 여전사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체첸 반군의 절반 가량은 여성 전사들로 알려졌다.

체첸측 인터넷 방송은 23일 인질극 발생 직후 "무자헤딘(이슬람 전사) 가운데는 20명 가량의 여전사가 포함돼 있으며 이들은 러시아군과의 전쟁에서 숨진 체첸 병사의 미망인"이라고 주장했다.

여성 전사들은 24일 모스크바의 NTV에 차도르를 쓰고 두 눈만 내놓은 채 권총을 들고 허리에 폭탄을 찬 모습으로 나와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극장 안을 취재했던 NTV 기자는 이들이 옷 안 맨 살에도 테이프로 폭탄을 붙이고 있었다고 전했다.

가부장 전통이 강한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이 직접 무장투쟁에 나서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경비가 삼엄한 모스크바 침투를 고민하던 반군 지도부가 상대적으로 검문이 허술한 여성을 전술적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체첸으로 흥한 푸틴 체첸때문에 망할라

체첸 반군의 모스크바 인질 사건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적잖은 정치적 타격이 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를 최고 통치권자의 자리로 이끈 것도, 최고의 국민적 지지를 누리는 인기 대통령으로 만든 것도 체첸 반군에 대한 그의 통치술과 맥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푸틴은 1999년 8월부터 러시아 남부와 모스크바 아파트 단지 등에서 잇달아 터진 반군의 폭탄 테러로 체첸에 대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이를 발판으로 그해 10월 2차 체첸전을 일으킨 사람이다. 당시 보리스 옐친 정부의 총리였던 푸틴 대통령은 그 때의 대대적인 반군소탕 작전으로 러시아 국민에게 나라의 안보를 책임질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강력한 지도자로 각인됐다.

연방보안국(FSB)의 전신인 국가안보위원회(KGB)의 최고 보안책임자 출신으로 테러리스트와 일체의 타협을 용납치 않는 원칙은 2000년 대선에서 결선투표 없이 1차 투표에서 그를 당선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그가 이끌었던 반군과의 대 테러전쟁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고, 사건이 어떻게 종결되느냐에 따라 그의 정치적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50여 명의 반군이 어떻게 집단적으로, 그것도 중무장한 채 러시아에 잠입해 모스크바 시내의 대형극장을 점령할 수 있었는지가 비판의 대상이다. 전문가들은 "보안이 주특기인 푸틴으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 이라며 8월 반군에 의해 러시아 수송헬기가 격추돼 85명이 사망한 것과 더불어 러시아 정부의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인질범들이 알 카에다와 연계돼 있다는 의혹을 부각시켜 이 사건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기회로 역이용하려는 시도를 할 것이라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한동안 러시아 국민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반군 문제가 다시 쟁점화했다는 자체로 푸틴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