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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할아버지… 순수를 사랑한 자유인 피카소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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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할아버지… 순수를 사랑한 자유인 피카소의 두 얼굴

입력
2002.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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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책이 있다. 사진작가 앙드레 빌레르스가 찍은, 70대 피카소의 얼굴이 인쇄된 똑 같은 표지(번역서 뿐만 아니라 원서의 표지도 같다). 그러나 내용은 결코 같지 않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 뜨거운 열정과 지치지 않는 실험 정신으로 19세기의 벽을 부수고 20세기를 세운 화가. 그 20세기를 풍미한 천재 예술가. 입체주의 혁명가, 장르 파괴자, 인간과 사물의 내면을 파악한 통찰자, 그리고 여성을 멸시한 괴팍한 사내.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피카소에 관한 책들. 나란히 출간된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와 '피카소의 이발사'는 그 많은 책 위에 새롭게 놓인 두 권일 지도 모른다. 두 권의 거리는 그러나 아득히 멀다.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마리나 피카소 지음/백선희 옮김/효형출판 발행 8,500원

마리나 피카소(52)는 피카소의 손녀다. 첫 부인 올가 코흘로바 사이에서 난 아들 파올로의 딸이다. 마리나는 14년 동안 정신 상담을 받은 뒤에야 할아버지에 대한 책을 쓸 수 있었다. 마리나가 쓴 책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는 이렇게 시작된다. "피카소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하지만 모든 게 뒤흔들린 그 순간까지만 해도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마리나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자신과 가족을 집어삼키고 절망에 빠뜨린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생활비를 얻기 위해 마리나와 오빠 파블리토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의 저택을 방문했다. "오늘은 주인님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대문은 아주 가끔씩 열렸고, 그 안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한 뭉치의 지폐를 아버지에게 건네 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무능한 인간이야. 평생 그럴 거야."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디저트를 주곤 했는데, '망디앙'이라는 그 과자 이름의 다른 뜻은 '거지'였다. 마리나가 여섯 달 되던 해에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는 '피카소'라는 이름을 트로피로 여겼다. 어머니는 이혼한 뒤에도 종종 사람들에게 "나는 피카소의 며느리에요"라고 말하곤 했다. 정신착란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던 어머니는 마리나와 파블리토를 돌볼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자주 끼니를 걸렀고 멀리 있는 학교까지 걸어다녀야 했다.

1973년 4월8일 일요일 파블로 피카소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손자와 손녀는 할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라디오로 들었다. 그들은 장례식에 초대받지도 못했다. 나흘 뒤 위대한 화가의 손자는 락스를 마셨다. 식도와 후두가 타버리고, 위가 파괴되고,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는 모습으로 피범벅 속에 누워 있는 오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마리나였다. 90일 뒤 파블리토는 죽었다.

마리나가 원했던 것은 그저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는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매일 바다로 나가는 어부 아버지를, 아이들을 위해 가정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를, 파블로 피카소가 아닌 다른 할아버지를 상상했다. 마리나는 할아버지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잊을 수도 없었다.

마리나는 막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 책의 마지막 몇 장에서 그는 할아버지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마리나는 자신만의 내면세계에 틀어박힌 천재 화가의 고독을 본다. "나는 그가 피신한 철책 문을 들어올리길 기다렸다. 어쩌면 그도 그걸 바랐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 순간에는 문이 너무도 무거웠고 그가 너무도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리나는 자신의 두 아이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사랑을 준다. 그는 세 아이를 입양한다. 그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서 그는 행복을 느낀다.

■피카소의 이발사/모니카 체르닌, 멜리사 뮐러 지음/박정미 옮김/시공사 발행 9,000원

마리나가 기억한 할머니 올가 코흘로바는 따뜻하고 푸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발사 에우헤니오 아리아스(93)는 올가를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한 것 같지는 않다. "결혼생활 내내 남편보다는 치장하는 일과 사교 모임에 더 열성이었으며…피카소의 연인 중 가장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였다." 피카소가 말년을 보낸 남부 프랑스의 소도시 발로리스. 이발사 아리아스는 그곳에서 26년 동안 천재 화가와 우정을 쌓았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모니카 체르닌과 멜리사 뮐러가 피카소의 벗 아리아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피카소의 이발사'가 되었다.

평생 한 여자만을 깊이 사모한 이발사 아리아스와 수많은 여자의 인생을 잔인하게 망쳐놓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천재 예술가 피카소는 이상하게도 순식간에 친밀해졌다. 그들이 공유했던 것은 투우와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었다. 조국 스페인이 독재자 프랑코의 손에 들어갔을 때 피카소는 민주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다시는 스페인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며, 죽는 날까지 그 맹세를 지켰다. 아리아스의 이발소는 스페인 공산당원의 회합장소였으며, 피카소의 아틀리에는 좌익 친구들와 레지스탕스 대원의 아지트였다.

피카소는 아리아스를 통해 지하조직에 비밀 자금을 전달하고 망명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독재와 파시즘에 저항했다. 그는 또한 작품으로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다. 역작 '게르니카'가 대표적인 것이다. "내가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것은 나의 모든 삶과 작품의 당연한 귀결이다. 내 그림이 곧 나의 무기였기에, 나는 그것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점점 깊이 파고들고자 했다. 내가 나의 그림을 가지고 진정한 혁명가처럼 투쟁했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알게 됐다."

기억은 주관적이다. 손녀 마리나가 그토록 미워했던 피카소의 두번째 부인 자클린은 아리아스에게 끈기있고 현명한 마지막 동반자로 기억된다. 그는 피카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아리아스에게 피카소는 단순함과 순수함을 사랑하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에 피카소의 예술은 스페인 현대사에 평화의 기원을 깊이 뿌리내린 나무이며, 오늘날 그 나무는 전세계에 가지를 뻗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고통의 뿌리로, 어떤 이에게는 세계 평화의 뿌리로 기억된다. 다르지만 같은 한 사람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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