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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학문 "제5세대"를 위하여

입력
2002.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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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학계를 세대별로 구분하면 4세대까지 이어져 왔다는 게 정설인 것같다. 일제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서구학문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제1세대, 미국등 서구에 유학해 원전을 읽고 돌아와 학문의 토착화를 시도한 사람들이 제2세대에 해당한다. 제3세대는 선배들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문화를 시도하고 있는 현직 중견교수들이며 제4세대는 그 아래의 젊은 학자군으로, 박사학위를 받고도 대학에 남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많다.황무지에 학문의 씨를 뿌린 제1세대의 공적은 당연히 높이 평가돼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행위는 주체성이 박약한 수입과 번역, 베끼기에 치중돼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그들에게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부르짖은 일본의 패러다임과 사고를 옮겨온 1세대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이 남겼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와 가토 슈이치(加藤週一)의 대담집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읽다 보면 시대와 학문을 바꾸는 번역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된다. 일본은 수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우리 1세대 학자들은 받아들이기에 바빴다. 그런 점은 제2세대도 어느 정도는 같다. 일률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한국을 해석하던 준거를 일본패러다임에서 서구(특히 미국)의 패러다임으로 대체했고, 우리 사회에 '새것콤플렉스'를 뿌리내리게 했다. 학문에서의 박래품(舶來品) 선호는 2세대에 이르러 더 심해진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글로 사유하기 시작한 그들을 통해 외국학문의 토착화 시도가 이루어지고 전세대에 대한 비판도 시작됐다. 큰 흐름으로 보아 주체성 확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진통을 겪어 온 우리 학문의 실제 출발은 제2세대부터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제3, 4세대는 신분 상의 불안정이나 아카데미즘에 대한 각 방면의 위협 등에서 선배들보다 여건이 나쁘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선배세대와 판이하다. 학제(學際) 간의 협력과 교류도 활발해졌다. 이제야말로 한국의 독자적 학문과 학파가 성립돼가는 듯한 양상이다. 곧 발족 1주년을 맞는 '우리 말로 학문하기 모임'이 상징하듯 학문의 종속성과 사대성에서 탈피하려는 노력도 두드러진다. 특히 제4세대는 전문화를 통해 연구와 교육, 사회봉사라는 지식인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 가고 있다. 다음 세대는 이들의 성취를 바탕으로 한국사회와 한국의 문화지리를 독창적으로 해독하고 분석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해야 할 제5세대의 앞길이 어두워 보인다. 생업의 터전이 부족해 고통을 겪는 것은 이미 제4세대부터 경험하고 있는 일이지만, 학문 후속세대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 시대에 문(文) 사(史) 철(哲)을 고루 갖춘 전인적 지식인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잘고 전문화하여 숲보다 나무만 보는 학자들이 양산되는 것도 문제인 터에 그나마 후속세대가 충원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특히 인간과 인류의 문화를 연구하는 정신과학, 이른바 인문과학 분야는 더 심하다. 최근 마감된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 전기 모집에서도 인문, 자연계열 기초학문 분야는 미달사태를 빚었다. 다른 대학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외국 학위만 알아주고 돈 되는 공부로만 학생들을 내모는 풍토에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탄탄해져야 할 국내 학문의 토대는 오히려 붕괴돼 가고 있다.

교육이 잘못돼 있고 학벌만 따지는 사회에서는 영재가 클 수 없다. 자연히 어려서부터 외국으로 떠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돌아오지 않는 두뇌가 많아진다. 그런데 정부는 기초학문 육성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연구자들이 든든하게 학계에 남아 있게 만드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학문 후속세대가 단절되면 우리는 또다시 남의 눈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볼 수밖에 없으며 외국의 학문과 문화를 번역·번안만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른다. 한국의 학문을 꽃피우고 열매맺게 할 제5세대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임철순 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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