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鄭亨根·한나라당) 의원이 22일 도청자료를 근거로 4,000억원 대북비밀지원설 축소수사요구 의혹을 제기한 것과 관련, 검찰 안팎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정 의원은 이날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이 이귀남(李貴男) 대검 범죄정보기획관과의 전화통화에서 '계좌추적을 하면 사건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단순 명예훼손 사건으로만 조사해달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간 4,000억원 계좌추적과 관련, 이 위원장 등 정부측의 미온적 태도가 사건축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정 의원이 제기한 의혹이 엄연히 실정법 위반사안인 도청을 통해 수집된 자료라는 측면에서는 이에 대한 별도의 수사착수 등 또다른 후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도청 당사자로 지목된 국가정보원은 "도청은 말도 안된다"며 억울함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어 실제 도청자료인지, 다른 경로로 입수된 정보인지 여부도 아직은 분명치 않다.
■축소수사요구설의 진위는
이 위원장과 이 기획관 모두 통화 사실을 시인함에 따라 관심은 둘의 대화내용이 정 의원 주장과 일치하는 가에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두 이씨는 축소수사 요구설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이 기획관은 23일 "10월 초·중순께 이 위원장이 (민주당 한광옥 최고위원과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간 고소사건) 처리절차를 문의해 통상 절차를 설명해 주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소사건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이 위원장이 수사관계자도 아닌 검찰총장의 측근참모에게 사건을 문의한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특히 "한 최고위원 지시로 대출해 줬다는 얘기를 이 위원장에게 들었다"는 엄 전 총재의 주장을 부인한 이 위원장이 사건진행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지적이다.
■국가기관 불법도청 논란
정 의원이 축소수사 요구설의 근거로 정보기관의 도청자료를 든 데 대해 대검 관계자는 "사실이라면 이는 법관이 발부한 감청영장에 의하지 않은 것이므로 명백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라며 "당사자의 고발이 있으면 당연히 수사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불법감청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의혹을 받아온 국가정보원측은 펄쩍 뛰고 있다. "전혀 근거없는 얘기"라며 오히려 '제3의 방법'에 의해 정 의원이 통화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정 의원이 "이 위원장과 전화통화를 했다"는 이 기획관의 보고를 검찰 등 관계기관에서 전해 들었으리라는 추정이다.
한편 정 의원이 어떤 식으로든 국가기관의 정보를 입수한 것은 분명한 이상, 정권말기 공무원들의 줄서기나 기강해이 등에 대해서는 진상규명과 책임추궁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높다.
/손석민기자 hermes@hk.co.kr
■ 통신전문가들 주장
1999년 15대 국회를 뜨겁게 달궜던 휴대폰 도·감청 논란이 정형근 의원의 도청 주장으로 재연됐다.
당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SK텔레콤은 공동실험을 통해 휴대폰감청이 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판정했었다.
당시 SK텔레콤 관계자는 "아날로그 전화는 음성신호를 그대로 주고받아 전파수신기와 감청장치만 있으면 특정 반경내 단말기의 통화내용을 모두 엿들을 수 있지만, 휴대폰은 숫자코드가 전송되기 때문에 전파추적 등으로 통화음성을 엿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통신 전문가들은 "100% 감청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휴대폰과 일반전화기 사이에 통화가 이뤄질 경우 일반 전화기를 감청하면 되고, 휴대폰 대 휴대폰으로 통화하더라도 전원이 켜 있기만 하면 휴대폰 사용자의 위치를 추적, 다른 장비를 이용해 감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통신 전문가는 "가장 감청이 어렵다는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휴대폰간의 통화도 휴대폰 고유번호와 부호, 메시지 시퀀스(연속 데이터)를 모두 해독하면 감청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럽에선 GMS방식 휴대전화에 대해 특정인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면 통화내용까지 녹음할 수 있는 도청기까지 개발돼 유통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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