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심장부인 수도 워싱턴 DC와 인접주에서 4주째 이어지고 있는 연쇄 저격 사건으로 이 일대 400만 시민들이 9·11 테러 이상의 공포감에 휩싸이고 있다. 내부의 총알 한 방이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 중인 미국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고 있다. 첫 발생일인 2일부터 22일까지 피해자는 모두 13명. 10명이 숨지고 3명은 중상이다. 경찰과 범인은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범인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버지니아주 애슐랜드와 리치먼드 이틀째 전면 휴교.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 '코드 블루'. 22일 이른 아침 또 한 발의 저격이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버스 기사 콘래드 존슨(35)의 생명을 앗아가자 워싱턴 일대 주민들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외출은 고사하고 학교나 직장에 갈 엄두를 내는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극도의 긴장에 따른 스트레스로 정신과 진료를 문의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대다수 시민들은 "범인이 모든 연령, 인종, 성, 직업의 사람들을 살해할 의도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사건 해결의 실마리도 잡지 못하는 경찰에 분노하고 있다.
■잇따르는 휴교, 통제 불능 상황
연쇄 저격범이 19일 범행 당시 사건 현장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 살인 가능성을 암시하는 메모를 남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워싱턴 일대 학부모와 학교 당국자들은 경악했다. 22일 몽고메리 카운티의 공립 학교들은 '코드 블루' 경계령을 발동해 야외 수업이나 방과 후 활동을 모두 취소했다. 수업은 블라인드를 내린 교실에서만 하고 있다. 사립학교는 이날 자체 휴교했다. 앞서 12번째 피해자가 발생한 버지니아주 남부 애슐랜드와 리치먼드의 초·중고등학교는 21일부터 전면 휴교에 들어갔다. 대상 학생들만 20만 명 이상이다.
주민들은 희생자가 많이 나온 쇼핑몰과 주유소 가기를 꺼리고 있다. 쇼핑객들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잰걸음이나 지그재그로 뛰어 매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천막이나 가리개를 친 주유소들도 늘었다. 운전자들은 몸을 잔뜩 구부리거나 기둥에 몸을 숨긴 채 기름을 넣고 있다. '수호천사'라고 적은 옷을 걸치고 기름을 넣어주는 신종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뉴욕타임스는 정찰비행기가 이미 공중에 떠 있고, 경찰 특별기동대(SWAT)가 움직이고 있지만 사태는 '통제 불능'의 상황이라고 전했다.
■중간 선거, 지역경제에 큰 영향
2주 남짓 남은 중간선거(11월 5일)에도 불똥이 튀고 있다. 옥외에 줄지어 서있을 유권자들의 안전이 가장 큰 문제다. 사건이 연발한 몽고메리 카운티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당일 사람들이 줄지어 바깥에서 기다리지 않도록 237개 투표장을 조기 개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선거일 전까지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각축이 벌어지고 있는 메릴랜드 주지사 선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차로 앞서고 있는 민주당 후보가 몽고메리 카운티와 프린스 조지 카운티에서 높은 지지를 얻고 있어 투표율이 승부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일부 시민들은 안전을 위해 아예 부재자 투표를 확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시민들이 바깥 출입을 삼가면서 지역경제도 얼어붙었다. 10월은 학교 수학여행, 교외 단풍구경 등으로 워싱턴 주변 경기가 상승하는 달이지만 특수가 사라졌다. 호텔과 레스토랑, 여행사 등에 특히 타격이 크다. 식당업자들도 "첫번째 피살 이후 매출이 40% 격감했다"고 걱정했다. 워싱턴 페어팩스 카운티의 대형 상가인 팬 암 업주들은 "9·11 테러나 탄저균 살포 사건 때보다 시민들이 더 큰 공포에 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대신 주문 배달 음식점이나 홈쇼핑 업체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저격중단대가 1,000만弗요구 사건 현장서 편지 잇단 발견
연쇄 저격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가 답보를 면치 못하는 가운데 범인이 경찰에 두 번째 편지를 보내 28일까지 자신의 계좌로 1,000만달러를 송금하라고 요구했다.
일간 볼티모어 선 지는 범인이 19일 12번째 저격 사건 현장에 편지를 남긴데 이어 22일 13번째 저격 사건 직후에도 3쪽 분량의 편지를 경찰에 남겼다고 보도했다.
비닐 봉지에 싸여진 새 편지는 13번째 사건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몽고메리 카운티 애스펜 힐의 노스 게이트 공원에서 발견됐다.
수사 책임자인 찰스 무스 몽고메리 카운티 경찰서장은 지난 48시간 동안 5차례나 TV 방송 카메라 앞에 서서 범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등 범인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동안 범인이 12번째 사건 현장에 남긴 편지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던 경찰은 이날 범인이 '당신들의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메시지를 남겼으며, 경찰과의 통화를 위해 수신자 부담번호인 800 국번 등을 제의해 왔다는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무스 서장은 범인에게 보낸 공개 메시지에서 범인이 제시한 방법들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사설 우편함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공군 정찰기가 워싱턴 상공에 투입돼 군경합동 검거작전이 벌어지고 미국의 거의 전 경찰력과 정보망이 총동원되다시피 하고 있지만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미 언론들은 다만 22일의 사건으로 미뤄 범인이 남쪽 리치몬드 일대까지 돌아다니다 사건 초기 범행을 저질렀던 몽고메리 지역으로 다시 돌아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경찰 주변 소식통들은 범인이 두 편지에서 저격을 멈추는 대가로 1,00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밝히고 있다. 은행 계좌에 송금을 하지 않으면 어린이들을 포함,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통상적인 인질 사건도 아니고'나는 신이다'라는 자신을 과시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남긴 점 등으로 미뤄 범인이 돈을 목적으로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분석하고 있다.
/남경욱기자 kwnam@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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